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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날 현 Jan 02. 2024

그 남자의 행방이 묘연 (猫緣)하다 -9-

힘든 순간마다 내 곁에는 고양이가 있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다섯 마리의 고양이들과 동고동락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지만 내 삶에 고양이가 오기 전 까지는 하루하루가 힘들었고 불안의 연속이었다.


나의 첫 고양이 ‘헤라’를 만난 2010년 5월의 나는 집에서는 아버지에게 가정폭력을, 학교에서는 동급생들에게 학교 폭력을 당하고 있었다. 빠른 년생으로 또래보다 신체적•정신적으로 미성숙했던 나는 학교에서 아무 이유 없이 물건을 빼앗기거나 구타를 당했고 학교가 끝나면 부모님이 운영하던 식당일을 도우며 밤에는 음주를 일삼던 아버지의 폭력을 견뎌야 했다. 만 나이로 14살에 불과했던 나는 매일 태어난 걸 후회했고 학교가 끝나면 아파트 옥상에서 한 시간씩 아래를 내려다보다 부모님 식당으로 가곤 했다.


금수와 인간을 가리지 않고 세상의 모든 부모란 존재가 ‘자식’이 생긴 이후부터 삶의 원동력을 얻고 책임감 하나로 모든 시련을 이겨내듯이 나 또한 첫 고양이 헤라를 돌보기 시작한 이후로 이 아이만 바라보며 그 시기를 버텼다. 내가 없으면 헤라를 돌볼 사람이 없으니까. 나에게 이 아이가 전부이듯이 이 아이게도 내가 자신의 전부일 테니까.


암흑기였던 중학교 시절을 이겨내고 졸업하여 고등학교 진학을 결정할 때쯤, 나는 나만의 방식대로 고마움에 보답하고자 전공을 ‘반려동물 산업‘으로 결정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된 후에는 유기동물보호소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거의 매일 내 손으로 차갑게 식은 아이들을 검은 봉지에 집어넣으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곳에서는 ‘내일 보자’란 약속이 얼마나 지켜지기 힘든 약속인지를 깨달았다.


사회에 나가 독립생활을 하며 부모를 잃거나 죽어가는 아이들을 데려다 보살폈다. 새로운 가족을 찾아준 아이들도 많지만 너무 어린 탓에 내 품에서 차갑게 식어 고양이별로 떠난 아이들도 여럿 있었다. 내가 퇴근하고 집에 돌아올 때까지 버티다가 나에게 마지막 울음소리를 들려주고 떠난 ‘봄이’라는 이름의 새끼 고양이도 있었다. 눈도 채 뜨기 전에 어미에게 버림받은 그 아이는 내가 돌보는 동안 눈을 떠서 세상을 보게 되었지만 얼마 안 가 내 품에서 고양이별로 떠났다.


새로운 가족을 찾아주지 못해 결국 내가 돌보게 된 아이들도 있다. 동생이 돌보는 ‘공주’라는 아이를 비롯해 내가 돌보는 5마리의 고양이들은 내가 독립 한 이후 한 마리 한 마리 구조한 원래는 길에서 떠도는 아이들이었다.


고양이들을 위해 술•담배를 끊었다. 벌써 3년째 이어지고 있다. 그 돈을 아껴 아이들을 위해 투자한다. 더 오래, 건강한 모습으로 함께 하고 싶어서.


돌이켜 보면, 모든 순간순간이 의미가 있었다.

시루를 제외한 우리 집 고양이들의 평균 나이는 4년 이상이다. 길고양이들의 평균 수명 3년. 이 아이들을 외면했더라면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들은 지금쯤 고양이별에 있었겠지. 더군다나 지금처럼 추운 겨울에는 그런 생각이 유독 많이 든다.


더 이상 새로운 가족을 늘릴 계획은 없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는 최대한 이 아이들을 위해 봉사하고 싶다. 내 삶에 고양이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나’ 또한 지금 이곳에 없었을 테니까.


‘사람은 동물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모든 생명을 지킬 권리를 부여받은 것이다’라는 말처럼. 이젠. 내가 지켜줄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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