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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시연 Jun 26. 2023

SF

괜히 미래를 걱정하다

전철을 두시간씩 고 출퇴근을 하다보면 두시간이라는 긴 시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되는지가 숙제와도 같습니다.  책을 읽을까,  어학공부를 할까,  게임을 할까,  뉴스를 볼까,  인터넷을 떠도는 가쉽거리를 찾아 읽을까....

다른사람들의 행태를 살펴봅니다.  사람들은 이 긴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요.

전철을 타보면 발견하게 되는 신기한 장면은 거의 99프로 이상이 휴대폰을 보고 있습니다.  대부분 무표정으로 조그마한 휴대폰 액정속에 시선은 고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도 똑같습니다.

생각해보면 전철이나 버스안에서 시간을 보내기 위한 방법은 극히 제한적이라는 것을 이해합니다. 끔 휴대폰이 없었다면 이 지루한 시간을 어떻게 보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시간을 사용하는 형태는 세가지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하나,  시간 보내기.

둘,  시간 죽이기.

셋,  시간 활용하기.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세가지를 혼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분량의 차이는 있겠지만요.

이 글을 쓰면서 슬쩍 옆에 앉아있는 사람의 휴대폰 화면을 훔쳐보았습니다.  둘다 게임을 하고 있군요.

 눈길을 사로잡는 앞좌석의 젊은이가 있습니다. 분명 대화를 나누는 일행이 없는데 희죽희죽 웃습니다. 귀에는 리시버를 끼고 소리를 죽이고 파안대소를 할때도 있군요.  무척 웃기는 장면을 보고있나봅니다.

그외에는 대부분 무표정입니다. 심지어는 행복한 사람처럼 표정이 편안해 보입니다.  사이버 컨텐츠들이 이들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만드나 봅니다.


우리는 각자 시간을 사용하는 방법을 터득해나갑니다.

무료한 시간을 어떻게든 지루하지 않게 억지로 시간을 죽입니다.  이 시간이 내인생에 도움이 될지 안될지는 상관하지않고 시간을 죽여나갑니다.  이는 내인생의 몇분의 몇을 죽이는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반면에는 이를 이용해서 부를 축적하는 부류도 있습니다. 긱종 컨텐츠들을 만들어 유통시키는 사람들이지요.  그리고 대중들은 그런 컨텐츠들에 서서히 함몰되어 갑니다.  자기도 모르게 빠져들고 중독되어 갑니다.  K-Pop가사나 현란한 랩의 가사나 게그맨들의 토크나 예능출연자들의 이야기가 오피니언 리더로 부상합니다.  지하철역 계단을 오르내리면서도 휴대폰을 봅니다. 만윈버스나 전철을 타고도 어떻게든 휴대폰을 보기위한 공간을 확보하려고 기를 씁니다.  그렇게 얻은 영상속의 장면들이 자신의 주의나 주장으로 탈바꿈되고 있습니다.

요즘 세대들은 식사를 하면서도 휴대폰을 봅니다.  손에서 휴대폰을 내려놓으면 죽을 것 같은가 봅니다.  그러면서도  밥을 정확하게 입에 넣는걸 보면 신기에 가깝습니다.  대부분 드라마나 예능프로그램 영상이나  만화를 봅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교양이 되고 고전이 되며 인생의 자양분이 되어갑니다.


단절을 생각합니다.

나와 컨텐츠를 벗어난 모든것들과 단절해 나갑니다. 리시버를 끼고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걸 수는 없습니다.  나에게 말을 걸지 말라는 강한 메시지 같습니다.  누군가 핸드폰을 보고 있는 사람을 실수로 툭치기라도 하면 싸늘하고 차가운 눈초리세례를 받습니다. 그러니 아무도 상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불문율이 되어 버렸습니다.

적극적인 단절의 상태입니다.  컨텐츠로 돈을버는 사람들은 더욱 개인을 대중들로부터 소외시키기 위해서 아이디어를 짜는듯합니다. 그게 성공하면 큰돈을 법니다. 이런것들이 장성하면 산업이 됩니다. 컨텐츠제작산업이 각광을 받습니다. 그리고 개인은 더욱 개인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빠져듭니다.  핸드폰만 있으면 외롭지도 않으며 소외를 느끼지도 않습니다.  재미난 영상속으로 자신을 지속적으로 밀어넣어 그것과 일체를 이루어냅니다.  


전기자동차를 제2의 스마트폰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지하철이나 버스나 사무실이나 가정에서, 즉 조금은 열려있는 공간속에서 생활하지만 전기자동차 시대가 오면 공간적으로도 완전히 외부와 차단된 상태에서 모든 사이버오락이 가능해진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오직 AI가 제공하는 컨텐츠들과 살아가게 될지도 모릅니다. 연애도 사이버공간에서 즐기고 사이버공간에서 사랑하는 AI와 섹스를 즐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최소한의 의무인 종족보존의 책임도 사라집니다.  그러면 가정도 사회도 스스로 파멸의 순간으로 달음질치게 될지도 모릅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유한합니다.  누구든 이렇게 살다가 죽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사는게 정당하다고 말하기도 어려워져갑니다.  어떤 사회적 현상을 비판하면 차별금지법에 걸려서 감옥으로 갈지도 모르겠습니다. 거칠게 말한다면 인간성 말살의 시대로 큰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참 다행스럽습니다.

이런 세상은 나의 죽음뒤에 올 것이라고 믿으니까요.  최소한 30년정도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만.

그러나 이런 산업들이 발전해 나가는 속도를 보면 나의 생도 안전하지는 않을 것 같아서 두렵습니다.

기술의 발전은 인간을 말살하고 알게 모르게 이를 부축인 극소수들에게는 부를 약속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인간을 풍요롭고 자유케하기 위한 기술이라 말합니다.  그러길 바랍니다.

그러나 영화에서와 같이 어느 사회건 악인은 존재합니다. 그들에 의해서 전혀 뜻하지않은 방향으로 떨어져서 인류가 멸망의 길을 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괜한 걱정이라고 충고라도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부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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