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터키 - Mammoth Cave National Park
아칸소에서 두 밤을 보내고 휴스턴에서 출발한 지 3일째, 오늘은 하루종일 운전을 해서 켄터키에 있는 Mammoth Cave National Park까지 도착하는 것이 목표였다. 정처 없이 이어지던 평지의 지루한 텍사스의 풍경과는 달리 아칸소와 켄터키의 풍경은 푸른 나무로 가득했다.
내 차는 2009년식 흰색 혼다 어코드인데, 작년 5월에 운 좋게 구매하게 되었다. 봄학기가 끝난 5월, 졸업 후 급하게 다른 주에서 취업한 같은 학교 학생으로부터 이 차를 구매했다. 차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던 나였기에, 차를 좀 아는 친구와 함께 테스트 드라이브를 했다. 이 가격에 이런 차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조언을 듣고, 그 자리에서 차를 구매하기로 결정했다.
로드트립을 떠나기 전 혼다 딜러쉽에 가서 전반적인 점검을 받았다. 오래된 차라 ‘가다가 서면 어쩌지’ 하는 막연한 불안함 때문에 꼭 점검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차를 구매한 이후 엔진 오일은 열심히 시간에 맞춰 교체했지만, 차에 대해 잘 모르는 나는 자동차에 사용되는 용액이 그렇게 많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브레이크 오일, 파워 스티어링 오일, 트랜스미션 오일, 그리고 냉각수까지, 이렇게 네 가지의 액체를 모두 교체하는 데 거의 $1000에 가까운 비용을 들였다. 그러나 이후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너무 많은 비용을 청구받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차알못은 웁니다)
휴스턴과 엘에이는 대중교통이 거의 없다시피 한 곳들이라 자동차가 없으면 생활이 힘든 도시들이다. 10대 후반부터 20대 중반까지 뉴욕에서 8년을 살 동안에는 운전의 필요성이 없었기에 한국에서 따놓은 운전면허는 그저 장롱 면허에 불과했다. 20대 중반, 엘에이로 이사를 가고 그제야 운전을 하기 시작했는데, 엘에이나 휴스턴 둘 다 교통체증이 어마어마한 도시들이라 운전이란 그저 스트레스 유발 행위 정도로 생각하며 살아왔던 나다. 그런데 이렇게 뻥 뚫린 고속도로로 장시간 운전을 해보니 오히려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나 시골의 고속도로들은 속도 제한이 꽤나 높아서 정말 마음먹고 쌩쌩 달릴 수가 있는데, 차가 울릴 정도로 크게 튼 음악, 끝까지 내린 창문과 함께한 운전은 스트레스 해소에 최고였다.
시골 고속도로를 계속 달리던 중 멤피스가 나왔다. 멤피스는 NBA 팀도 있는 꽤나 큰 도시인데, 이렇게 지나가 보는 것이 신기했다. 미국에서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곳곳에 숨어있는 경찰차들을 볼 수 있다. 특히 속도 제한이 바뀌는 구간에서 숨어 있다가 과속하는 운전자들을 잡곤 한다. 멤피스는 큰 도시라 속도 제한이 바뀌는 곳이었나 보다.
오른쪽 갓길에 숨어있던 경찰차를 보자마자 ‘아… 걸렸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급히 속도를 줄였지만, 워낙 빠르게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뒤에 붙은 경찰차가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왼쪽 갓길에 차를 세웠다. 인상 좋아 보이시는 흑인 경찰분이 내 창문에 와서는 ‘아가씨 지금 몇 마일로 가고 있었는지 아나요?’하며 물었다. 솔직히 알았지만 숫자를 말하면 너무 현실이 되는 거라 ‘모르지만 무조건 미안’하다며 사과를 했다. 경찰아저씨도 내가 스스로 내 죄를 인정하는 것을 보셨기에 별말 없이 자기 차로 돌아갔다. 약 5분이나 지났을까, 과속 딱지를 들고 돌아오신 경찰아저씨. 10마일 초과 딱지만 뗐다며 인터넷으로 들어가서 납부하면 된다고 친절하게 가르쳐 주시고는 ‘천천히 가세요’라는 말을 남겼다.
몇 달 전, 부정적인 마음으로 가득했을 때 이런 일이 발생했다면 너무 속상하고 화가 나서 펑펑 울었을 텐데, 요 근래 맘고생을 좀 하고 나니 ‘이만하길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사실 속도를 10마일 보다 훨씬 이상 초과 했으니 더 비싼 벌금을 내야 할 수도 있었고, 무서운 경찰을 만나서 안 좋은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부정적인 시각으로 상황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정말 끝도 없다.
과속티켓을 받고 얼마 되지 않아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친구에게 상황을 얘기해 줬더니 크루즈 컨트롤을 사용하지 않았냐며 물었다. 한 번도 크루즈 컨트롤을 사용해 본 일이 없는 나였기에 친구의 설명을 듣고 크루즈 컨트롤을 처음으로 작동했을 때는 마치 신세계를 접한듯했다.
테네시와 켄터키를 운전하며 내가 가장 좋아하는 현대 작곡가 중 하나인 Michael Torke의 음악을 끊임없이 들었다. Michael Torke는 포스트미니멀과 네오클래식 스타일을 결합하여 음악을 작곡하는 작곡가 중 하나이다. 요즘의 현대 음악은 무수한 스타일로 나뉘며 몇 가지 예시로는 음파 주파수를 분석하여 수학적인 기법을 활용하는 스펙트럴 음악, 간단하고 반복적인 구조를 중심으로 패턴을 만드는 (포스트) 미니멀 음악, 그리고 전자음악과 어쿠스틱 음악을 접목한 일렉트로 어쿠스틱 음악 등이 있다. 이 날은 2004년에 작곡된 발레 음악인 Michael Torke의 "An Italian Straw Hat" (https://www.youtube.com/watch?v=0ablU-5fyYs&ab_channel=MichaelTorke-Topic)을 반복해서 들었다. 이 작품은 19세기 음악과 혼동될 정도로 모차르트나 로시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자세히 들어보면 Torke의 참신한 악기편성으로부터 현대 음악의 창의성과 독창성을 발견할 수 있다.
엘에이에서 공부하던 시절, 그때 사사하던 선생님을 통해 Michael Torke와 연락을 하게 되어 내 음악을 공유할 기회가 생겼다.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을 위해 작곡한 곡과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해 작곡한 곡 등을 이메일로 보냈었는데, Torke로부터 매우 자세하고 격려에 찬 응답을 받게 되어 무척이나 기뻤다. 특히, Torke는 클라리넷 곡인 'Weather Change' (https://on.soundcloud.com/Wv7qh)를 높이 평가해 주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다른 젊은 작곡가들과는 다르게 과시 (ostentation)가 없는 직접적인 (direct) 음악을 작곡했다며, 마스터 풀한 곡이라며 극찬해 주었다. 이 글을 쓰며 2017년의 그 이메일을 살펴보게 되었는데, 다시금 나 자신에게 더 높은 목표를 세우고 더 나은 작곡가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존경하는 작곡가에게 나의 음악을 들려줄 수 있는 기회는 정말 소중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Mammoth Cave National Park에 다섯 시 반쯤 도착했다. 파크에 들어오자마자 사슴을 만났다. ‘아 자연이여’ (지난 글에 이은 자연인 코스프레 2) Mammoth Cave에서는 파크 안에 있는 오두막을 예약했다. 안내소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어서 내일 오전에만 관광을 할 계획이었던 나에게는 아주 편리한 위치였다. 사실 이 모든 숙소와 여행루트는 나의 프로등산러 친구가 세심하게 짜준 것이었는데, 어찌나 계획을 잘 짰는지 모든 일정이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고마워)
짐을 오두막에 옮겨놓고 저녁을 먹으러 읍내로 나갔다. 가는 길이 얼마나 예쁘던지, 캔자스가 어떤 곳인지 전혀 상상하지 못했는데 와서 보니 너무 좋았다. Cracker Barrel 이 있길래 들어가서 저녁을 먹었다. Cracker Barrel은 남부 감성이 넘치는 레스토랑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온갖 불량식품과 잡동사니를 파는 입구를 볼 수 있다. 이곳에서 음식을 주문하면 바로 비스킷을 가져다주는데, 버터 향을 풍기는 따뜻한 비스킷은 정말 눈물 날 만큼 맛있다. 이런 남부의 시골을 여행하다 보면 정말 백인들만 있는 상황을 자주 마주치게 된다. 내가 살았던 뉴욕, 엘에이, 휴스턴은 대도시로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지만, 이런 시골에서는 오래된 영화에서나 볼 법한 모습을 한 찐 미국인들을 볼 수 있다. 게다가 이런 시골은 서비스가 답답할 정도로 느리다. 도시에서는 빠른 회전율이 중요하지만 이런 곳에서는 모두가 느긋하게 움직인다. 도시에서는 20분이면 충분히 먹고 나올 저녁식사가 이곳에서는 1시간가량 걸렸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해가 이미 지고 있었다.
파크에 돌아오는 길에 도로에 무슨 통나무와 같은 것이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해서 속도를 줄였다. 더 자세히 보니 부엉이!! 신기했다. 도착해서 주차 후 시동을 끄니 정말 온 세상이 너무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나는 길눈이 아주 밝은 편이라 한번 가 본 길은 대충 찾을 수 있는데,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하고 보니 오두막이 어딘지 찾을 수가 없었다. 핸드폰으로 불을 비춰 오두막을 간신히 찾았다. 샤워를 하려고 보니 벽에 개미가 있었다. 요 근래 자연인 생활을 좀 하다 보니 벌레가 좀 나와도, 호텔처럼 깨끗하지 않아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나가는 레벨에 도달했다. 내 여동생은 무척이나 벌레를 무서워하는데 얘가 이걸 봤다면 아마 그 자리에서 짐을 싸서 나갔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자려고 누우니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나는 생각에 가득 차서 잠을 못 들 때 하는 의식이 있다. 일단 눈을 감는다. 머릿속에 큰 하얀 방을 그린다. 방의 끝에 있는 벽까지 걸어가면 스위치가 있는데, 그 스위치를 끄면 하얀 방의 불이 꺼지면서 내 생각들도 사라진다. 암흑의 방만이 남는다. 이건 거의 최면을 걸 때 사용하는 “레드썬”과 같은 이치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내 버전의 “레드썬"을 실행한 후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