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버니 Sep 16. 2023

로드트립과 연애사 (4)

켄터키 - Mammoth Cave National Park


Mammoth Cave National Park에서의 아침이 밝았다. 주변의 여행 스타일을 둘러보면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여행 전 시간과 분 단위로 계획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단 가서 결정하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일단 큰 그림만 그려놓고 가서 결정하는 후자에 가깝다. 두 가지 방식 모두 장단점이 있지만, Mammoth Cave에 오기 전날 투어를 예약하려고 확인했을 때 거의 모든 투어가 매진되었음을 확인하면서 조금 더 일찍 계획을 세웠다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가 들었다. 다행히도 친구의 도움을 받아 아직 자리가 있는 오전 10:30의 Cleaveland Tour를 예약할 수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서둘러 준비를 한 후 짐을 차에 싣고 오두막의 열쇠를 반환했다. 투어 시작 전에 조금 여유 시간이 있어서 가까운 산책로를 따라 짧은 산책을 즐겼다. 이 아침 등산 루트에서도 사슴을 봤는데, 요 며칠 매일 사슴을 시도 때도 없이 보다 보니 이제 그다지 큰 감흥이 생기지 않았다.


배트맨 나올 각

짧은 하이킹 후 투어를 위한 집합 장소에 도착했다. 집합 장소에서는 이 투어를 인솔할 파크레인저로부터 주의 사항을 듣고 투어 버스에 탑승했다. Mammoth Cave National Park는 세계에서 가장 큰 석회암 동굴 중 하나로, 18세기말에 발견되어 매년 수색이 계속되면서 이 동굴의 규모를 아직도 확장하고 있다. 버스에서 내려서 파크 레인저의 안내와 함께 동굴 내부를 구경했는데, 정말 멋진 경험이었다.


한 시간 가까이에 걸친 투어 동안 파크레인저는 약 10분마다 새로운 구역의 조명을 켰다. 중간 지점에 도착했을 때, 파크 레인저는 일부러 조명을 껐다. 그 결과, 내가 이전에 경험한 어둠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정말 칠흑 같은 암흑을 체험했다. 파크레인저는 우리에게 각자의 손을 얼굴 앞에 놓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지 확인하라고 했는데, 실제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도시에서 살다 보면 한밤중에도 밝은 조명들로 인해 완전한 어둠을 찾기 어려운데, 이러한 자연 경험은 도시 생활에 익숙한 나에게 매우 인상적이었다. 동굴 벽면에는 수백 년 동안 형성된 석화 (gypsum flower)가 가득했는데, 파크 레인저가 조명을 사용하여 각 구역의 화려한 색상을 가진 석화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수백 년 동안 자연이 만들어낸 석화는 각각 다른 형태를 띄우며 영롱하게 빛났다.


자연이 주는 신비함은 인간이 만든 어떠한 구조물보다도 대단하다. 지난 100년 동안 급격하게 성장한 세계적인 산업화는 지구를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해쳤는데, 기후변화로 인한 피해가 증가하는 요즘, 이런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을 볼 때마다 우리의 경각심은 한층 깊어진다. 지난 3년 간 내가 가장 존경하는 멘토 Gabriela Lena Frank 가 진행하는 Composing Earth라는 기후 위기 프로그램의 일원으로서 많은 공부를 하게 되었다. 나의 멘토 Gabriela는 정말 본받을 점이 많은, 나에게 어마어마한 영감을 주는 사람이다. 전통적임을 넘어서 퇴보적이기까지 한 음악학교들의 시스템에 회의감을 느낀 Gabriela는 몇 년 전 자신만의 아카데미를 시작했다. 음악세계에서 자신의 입지를 사용하여 촉망받는 젊은 작곡가들을 지원하며 가족 같은 분위기를 조성했다. 음악 학교에서는 보기 드문 파라다이스 같은 환경을 만들었다.


Composing Earth 프로그램은 약 3년으로 이루어져 있다. Gabriela가 직접 뽑은 10명의 젊은 작곡가들로 이루어진 이 그룹은 기후변화 문제에 대해 심도 있게 배우고, 이 배움을 바탕으로 3년 차에 곡을 의뢰받고 쓰게 된다. 작곡가마다 다른 악기편성의 의뢰를 받는데, 나는 Annapolis Symphony의 정규시즌에 곡을 쓰는 의뢰를 받았다. 워낙에 규모가 큰 곡이라, 곡을 쓰기 전 구상을 평소보다 굉장히 오래 했다. 내 곡들은 대부분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작곡되는데, 기후변화는 너무나도 큰 주제이다 보니 어떻게 곡에 녹여야 할까 고민을 많이 했다.


몇 년 전, 미국에서 십 수년을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방학 때만 잠시 돌아왔던 한국에 와서 몇 달을 살 기회가 생겼다. 한국의 봄은 내가 알던 봄과는 너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중국에서 날아오는 미세먼지 때문에 파란 하늘을 볼 기회가 무척이나 드물었다. 요새 어린이들은 미세먼지가 가득한 하늘을 자주 보고 자라기에, 그림을 그릴 때 회색으로 하늘을 칠하는 상황을 종종 볼 수 있다고 들었다. 파란 하늘을 매일 보지 못했어도 나에게 언제나 하늘은 푸르기에, 회색의 하늘을 그리는 어린이들의 이야기는 나에게 아주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내가 알고 있는 푸른 하늘은 더 이상 현실이 아닌, 나의 기억에만 남아있는, 상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의 기억 속에 살고 있는 어릴 적의 푸른 하늘, 잃어버린 푸른 하늘의 현재, 다시 돌아오길 기대하는 푸른 하늘의 미래에 초점을 두어 곡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남프랑스에서의 마법같던 열흘

작년 5월에 프랑스에서 3주를 보냈다. 전 남자친구가 프랑스에서 레지던시를 하고 있던 때라 학기가 끝나자마자 현실 도피 수준으로 짐을 싸서 그가 있던 파리로 떠나버렸다. 파리에서 며칠을 보내고 우리는 차를 렌트해서 남프랑스로 떠났다. 엘에이에 사는 친구의 Chateau (대저택)에서 열흘 정도를 보낼 계획이었다. 친구의 대저택이 있는 동네는 무척이나 조용한 남프랑스의 시골인데, 풍경이 정말 아름다운 곳이다. 아무도 없는 텅텅 빈 대저택에서 그와 보낸 열흘은 마법과도 같았다. 느지막한 아침, 따스한 햇살이 창가에 비치면 알람의 도움 없이 일어나서 지난 새벽에 있었던 NBA 하이라이트를 보면서 아침을 먹고는, 그는 연습을 하고, 나는 작업을 하고. 오후가 되면 동네에 있던 슈퍼마켓에 가서 오늘은 뭘 요리하나 고민하다 그날의 장을 보고, 요리를 매끼 하고, 저택의 마당이나 동네에서 산책을 하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조용하고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가끔 이웃 프랑스 할머니댁에 가서 수영을 하고 저녁을 같이 먹는 것을 빼고는 둘이서만 보낸 시간이었는데, 이곳에서 보낸 시간은 정말 이 세상에 우리 둘만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줬다. 남프랑스의 맑은 하늘 아래,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를 가졌던 그는 마치 투명하리만큼 반짝이며 빛났다.



그 시절 눈물 가득한 페이지들 (비련의 여주인공 시절)

작년 7월, 다시 한동안 연락을 안 하는 게 좋겠다며 우리는 이별 아닌 이별을 또 했다. (지겹다 지겨워, 미안합니다 여러분) 그러고는 7, 8월을 정말 미친 사람처럼 살았다. 울면서 일어나고 울다가 잠들고, 슬픈 꿈은 왜 그렇게 꿔댔는지, 가끔 보면 내가 너무 전형적인 감성 터지는 작곡가 같은 짓을 해대서 난감하다. 한 달 반을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살다 어느 날 밤, 이렇게 울고 싶을 때마다 짧은 멜로디나 피아노 녹턴을 써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쓴 아주 짧은 멜로디 중 하나는 남프랑스에서 보낸 시간의 기억을 바탕으로 쓰게 되었는데, 그 멜로디가 Annapolis Symphony 곡의 Idee Fixe (베를리오즈가 처음 사용한 모티브 기법) 가 되었다.


'남프랑스의 푸른 하늘 아래에서 반짝반짝 빛나던 그, 그가 사라진 현재, 그가 없어도 행복하기를 바라는 나의 미래'를 '나의 기억 속에 살아있는 어릴 적의 푸른 하늘, 미세먼지로 가득한 회색의 하늘의 현재, 예전과는 다르겠지만 다시금 푸른 하늘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미래'와 연관 지어 곡을 쓰게 되었다. 작곡 초반에는 3개의 악장으로 구상했으나, 작업을 하면서 4악장의 형태로 바꾸게 되었다.


 1. Memories of Blue

 2. The Blue Hour

 3. Fading Blue

 4. Letter to My Blue


라는 제목을 가진 4악장으로 이루어진 곡인데, 이번 10월 말에 워크숍을 하게 되고, 4월 중순에 3번의 연주를 한다.


로드트립의 긴 운전 도중 이 곡의 미디파일들을 들었다. 특히 Mammoth Cave를 구경하고 나온 이 날은 차가 터질 만큼 볼륨을 크게 틀어놓고 몇 시간 동안 반복해서 들었다. 미디파일을 운전하면서 듣게 된 것은 최근에 시작한 습관이다. 악보를 보지 않고 작업하는 곡을 반복해서 들어보면 곡의 흐름이나 구조에 더 집중하면서 들을 수 있어서 작업할 때 도움이 된다. Mammoth Cave에서 나의 마지막 종착지인 웨스트버지니아 역시 7시간 정도의 거리였다. 내 곡을 들으며 Appalachian (애팔래치안) 산맥을 따라 지나가던 여정은 너무나도 멋졌다.


드디어 마주한 Morgantown 표지판!!!!!!!

1000마일이 넘는 긴 거리를 운전한 끝에 드디어 만난 Morgantown 표지판은 감동 그 자체였다. 켄터키에서 웨스트버지니아를 지나가며 시차가 한 시간 바뀐 터라 밤 9시에야 친구의 집에 도착했다. 이 긴 여정 끝에 만난 친구는 너무나 반가웠다. 웨스트버지니아 대학교에 교수직을 잡아 이번 여름에 휴스턴에서 이사를 떠난 친구인데, 4년 전 학교에서 처음 만났을 땐 서로 ‘뭐 이런 애가 다 있나’ 생각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주 친해진, 나에게는 둘도 없는 친구이다. 친구는 작년에 결혼을 했는데, 남편 또한 나와 아주 친한 친구 중 한 명이다.




라면은 언제 먹어도 진리 아입니까

친구 남편은 요리를 셰프만큼 잘하는데, 내가 도착하니 라면을 완전 분식집 스타일로 끓여줬다. 라면을 먹고 자려고 누우니 이 먼 거리를 왔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