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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강나무 Jun 13. 2023

<설화다시읽기>  아랑은 왜 직접 복수하지 않았을까

이조 초년 밀양 부사의 무남독녀 아랑은 아름다운 마음과 침선방적에 글도 뛰어나 부모의 자랑이었다. 각처에서 청혼이 들어왔으나 부모의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다.


그런데 이 고을의 젊은 관노가 아랑에게 연심을 품어 병이 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다 아랑의 유모를 돈으로 매수하여 달 밝은 밤에 아랑을 영남루로 나오게 했다. 유모는 자리를 피해 주고 관노는 아랑을 범하려 했지만 완강하게 반항하자 아랑을 칼로 찔러 죽이고 대수풀 속에 버리고 달아났다.


아랑이 사라지고 그 아버지는 다른 지방으로 이직되었다. 희한하게도 새로 부사가 부임하기만 하면 첫날밤을 넘기지 못하고 원인 모를 병으로 급사하여 아무도 밀양부사직을 원하지 않았다. 그 소문을 들은 시골 봇짐장수가 자원하여 밀양부사를 제수받았다. 밤이 깊어지자 아랑의 원귀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나타났다. 아랑은 관노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자신의 원수를 갚아 달라고 애원하면서 다음 날 흰나비가 되어 그 관노의 갓 위에 앉겠다는 말을 하고 사라진다.


다음 날 신임 부사는 그 관노를 잡아 곤장을 치고 자백을 받아내었다. 부사는 관노를 죽이고 아랑의 원수를 갚은 뒤 치제를 지내 아랑의 원혼을 위로해 주었다. 아랑은 부사에게 백배사례하고, 이후 그 원혼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 뒤 아랑의 정절을 기리기 위하여 영남루 아래 아랑각이라는 사당을 지어 해마다 4월 16일에 제사를 지냈다.  


이조 초년이라고 서술된 시간적 배경을 고려하면 당시 사회의 기본 사상이자 사회 윤리는 성리학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인, 의, 예, 지, 신이 성리학의 실천 ‘덕목’이며, 자주 언급되는 『논어』, 『맹자』, 『대학』, 『중용』, 『예기』 등은 성리학을 경전화시킨 텍스트이다. 일반 백성들의 교화를 목적으로 한 『삼강행실도』나 『오륜행실도』등의 수양서는 충신, 효자, 열녀의 행적을 수록한 책이다.


위 이야기에서 아랑은 아름다운 마음에 글도 뛰어난 여성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므로 아랑은 당시 성리학을 이념적으로 수용하고 자식의 도리와 여성이 지켜야 할 도리를 잘 알고 있다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이야기의 제목은 <아랑 전설>이다. 제목을 보면 아랑에 관한 이야기로 아랑의 행적이나 아랑의 어떤 점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아랑 전설에 나타난 아랑은  '아름다운 마음과 침선방적에 글도 뛰어난' 것으로 짧게 서술되어 있을 뿐, 이야기의 전체 흐름은 여성이 지켜야 할 ‘정절’에 관해서이다. 자신의 정절을 지키려다 아랑은 죽임을 당하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버려졌다. 억울한 죽임 때문에 원귀가 되어 저승으로 가지도 못하고 이승을 계속 떠돌았다.


아랑이 신임부사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이들은 모두 공포로 죽었다. 여기서 아랑의 모습이 얼마나 두렵고 공포스러운지 짐작할 수 있다. 이 부분에서 아랑이 자신을 비참하게 죽인 관노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이유가 궁금해진다. 부사들이 비명횡사를 했다면 아랑을 죽인 관노 역시 비슷한 처지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랑은 자신의 억울함을 신임부사에게 말하고 부사는 관노를 죽여 아랑의 원수를 갚는다는 결말은 당시 여성은 죽어서도 사회적 가치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신분제 사회에서, 여성은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남성을 귀신이 되어서도 직접 처단하지 못한다. 당시 여성의 지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딸이 행방불명이 되었는데도 딸의 행방을 끝까지 찾지 않고 충의 의무에 따른 아버지의 행동 역시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어떠했는지 잘 보여준다.


아랑이 정절을 지키고자 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아랑각을 짓고,  ‘지금도’ 아랑의 '정순정신'을 본받게 하기 위해 아랑규수 선발대회가 열린다. 몇 가지 선발 기준 중에 절과 예절, 다과상 차리기가 있다. 다과상을 차리며 가져야 할 예절의 강도는 어디까지여야 하는가. '정순정신'을 기린다는 표제 아래 여성에게 강요하는 것은 무엇인가? 여성의 순결이 목숨과 맞바꿀 정도로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하는 그 저의가 궁금하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여성의 기본 자질이나 덕목을 고려할 때 '한 인간'이 아닌 그저 '생물학적 여자'이길 원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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