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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trospect Apr 18. 2023

남자친구를 이해하기 위해 "공감 능력 부족"을 검색했다

생각지 못한 결과에 눈이 뜨이다 7

그렇다. 남자친구를 이해하기 위해 "공감 능력 부족"을 검색했다. 

그것 밖에는 그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나의 서운함에 대해 연애 초반에 남자친구가 했던 말이 있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길, 서운함은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고서는 나타날 수 없는 감정이라고 하더라. 앞으로 네가 서운하다고 하면 네가 나를 좋아해서라고 생각하고 이해해보려고 해야겠어.'

남자친구가 나를 위해 이해하려고 한다니 고마운 마음이 앞섰다. 여자친구의 서운한 감정 자체를 기계적으로 이해해서 위안을 제공하겠다고 했던 그의 말이 신기하긴 했지만 나를 위해 그렇게까지 해준다니 감동의 도가니였다. 드디어 나의 아낌없는 사랑과 노력이 빛을 발하나 보다!

그의 공감 능력은 필요의 상황에 만들어 진 것임이 분명했고, 내가 최대한 노력해서 그 능력을 최대치로 길러나가고 싶었다. 엄한 아버지 밑에서 얼마나 감정을 누르고 살았으면 공감의 방법조차 모르고 살았을까. 그가 너무 딱했다.


검색 결과에 나는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공감 능력이 결여된 사람의 유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었다.

1. 나르시시스트

2. 사이코패스/소시오패스

3. 자폐증


말도 안 돼.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내 남자 친구가 저 중 하나라고? 5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잘 생각도 나지 않는다. 밤낮의 구분 없이 관련 글과 영상들을 훑어 나갔다.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이런 낙인을 그에게 씌우는 것이 여자 친구로서 할 수 있는 일인가 죄책감이 들었다. 혹시 내가 편집증이 있는 건 아닐까, 혹시 내가 경계성 인격 장애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스러웠고 무서웠다. 


아니면...

결론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 결론을 내기까지 다른 가능성들에 마지막으로 무게를 더 실어보자라는 의지의 발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너무도 명확하게 그는 나르시시스트의 전형적인 특성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동안의 돌고 돌았던 대화들, 이해받지 못해서 답답했던 나의 마음들, 나를 벌주는 듯한 잠적의 시간들, 본인 베프에 대한 무시하는 평가들, 기분 나쁜 별명으로 나를 불렀던 순간들, 그를 위해 고쳐야 했던 내 말 습관들, 스트레스 상황에 택시 기사님에게 보였던 수동 공격성, 동물을 가족처럼 생각하는 사람에 대한 이해 불가, 낮은 준법정신, 애기들을 괴롭혀서 울리는 것이 취미라는 그의 이야기, 집착했던 시계, 구두, 그리고 차, 사랑을 책임감의 의무로 납득해 온 삶, 감사와 인정에 대한 마르지 않는 욕구, 알 수 없는 웃음 버튼, 쥐어짜는 듯했던 알 수 없는 상황에서의 그의 눈물, 갑을 관계니 알파 베타니 하며 자꾸 매기려 했던 우리 관계의 서열. 이 외에도 셀 수 없이 반복되었던, 무언가 찜찜하고 이상하지만 그냥 넘어갔던 순간들 속에 그의 나르시스틱 한 성향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그를 사랑하기에 드는 자연스러운 내 감정을 설명하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 설명에 진심이 담기면 담길수록 우리의 사이는 불통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점점 더 심연으로 빠졌고, 나는 언제부턴가 심장이 쿵쾅거리고, 절제할 수 없는 답답함과 화남에, 일을 하다가도 일기를 써야 했고, 밖에 나가 뛰면서 내 마음을 달래는 일이 잦아졌다. 

나는 그와 결혼 생활을 한 것도 아니었고, 그는 악성 나르시시스트도 아니었다. 그는 내현적(covert) 나르시시스트였고, 내가 그에게 순응의 태도를 보이고 감사함을 많이 표현하면 우리 사이는 누가 봐도 부러워할 만한 그가 말했던 '파워 커플'이었다. 나르시스틱 관계의 생존자라고 칭하기에도 민망한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작은 싸인이 내 이야기 같다면 꼭 나르시시스트에 대한 공부를 해보는 것을 권고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들은 치료도 불가하고 파트너의 삶을 피폐하게 이끌고 가는 사회의 해악이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도 교묘해서 사회에서 걸러지기가 너무나도 힘들다. 그들은 이타적인 사람들을 벤치마킹하여 이타적인 삶을 살기도 하고, 당신과의 대화를 미러링 하여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제공하는데 아낌없는 시간과 돈을 투자하기도 한다. 내 남자친구 역시 교회 선교활동도 다녔었고, 친한 선교사님에게 정기적으로 후원을 하고 있었다. 성 착취자 관련 이야기가 나오면 피해자가 비난받는 이 사회가 슬프다고 했고, 내가 가진 상처들을 보듬어주고 싶다고 했었다.

그들의 특징인 애정공세(love bombing)는 사람의 혼을 쏙 빼가는 힘이 있고, 우리는 그 단계에 존재했던 완벽했던 그 사람을 되찾기 위해 그 후 오랫동안 나 자신을 버려가며 좀비와 같은 삶을 자처한다. 그들은 미운 7살과도 같기에 그들에게 희생을 요하는 고차원적인 사랑은 애초에 이해하기 힘든 개념이다. 그렇기에 감정적 교류를 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를 위하려 하는 일반 사람들은 이런 사람과 관계를 가지면 가질수록 마음이 답답하고 말라갈 수밖에 없다. 


나르시시스트를 사랑했던 사람으로서 그가 안타깝고 불쌍했다. 후천적인 기질인데 왜 치료가 불가할까 원망도 되었고, 나의 사랑으로 할 수 있는 한의 모든 치료의 가능성을 테스트해보고 싶기도 했다. 열의 열은 그들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아닌 이상 도망가라는 해결책을 제시했고, 관련 사연들 역시 왜 내가 더 빨리 도망가지 못했었나에 대한 후회로 가득했지, 나르시시스트적 성향에 차도가 있었다는 사연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이러한 고민을 하고 있었을 무렵, 너무나도 다행히 그에게서 이별 통보를 받았다. 

나는 그에게 지배당하기에 너무 올곧은 사람이었을까? 나에게 옷차림에 대한 지적을 할 때마다 그것은 선을 넘는 행위라고 단호히 말했던 내가 그에게는 투머치 알파였을까?

잘 당황하고 순둥 하기만 할 것 같던 내가, 공감을 못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이런저런 가능성을 점치는 것을 보면서 본인의 약점이 드러나게 될까 두려웠을까?

아니면 그가 자랑하듯 말했던, 한 번도 차인적 없는 그의 레코드를 유지하고 싶어서였을까? 버려질 것이라는 것에 대한 불안함을 본인이 선수 쳐서 해소하고 싶어서였을까?


그는 본인이 굉장히 차분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물어본 적도 없는 그의 차분함. 잘 알겠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렇게 서로 좋아했던 본인의 연인을 떠나보내는 것이 슬픈 것이 당연한 것일 텐데, 그는 이별의 순간에도 자신이 우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르시시스트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기에 감정에 솔직한 사람을 호구 또는 나약한 바보 정도로 바라본다.) 


그가 나를 보내줘서 너무나도 감사하다. 내 1000%의 노력을, 사람이 아닌 무감정의 로봇에게 쓰지 않아도 되어서 너무나도 감사하고, 내 감정을 누르기만 했어야 했던 이 욕구불만의 관계의 정점을 못 찍고 있었던 나를 해방시켜 주어서 너무나 감사하다. 그는 그의 세계에서 신이었고, 나는 불복종하는 신도였다. 나는 그에게 애기처럼 삐지기 좋아하는 감정적인 존재였고, 이상한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귀여운 꼴통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아무리 '귀여움'이 곁들여진 꼴통이더라도, 나는 나에 대한 그러한 명명법이 싫었고, 내 감정이 내가 유치하기에 발현되는 것이 아닌 정상적인 표현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직도 가끔씩 화가 나고 심장이 고장 나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의 부류가 있었다는 삶의 교훈을 얻었기에 감사하다. 누군가를 나의 사랑으로 교화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나의 생각이 얼마나 교만한 것일 수 있는지 배웠다. 누군가를 내 잣대로 평가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만 결코 부정적이지만은 않은 일이다. 당신은 당신을 위해서 그래야 할 의무가 있으며, 누군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일이 점점 잦아지고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자신에게 가하는 학대이다. 애착의 관계를 정리하고 객관적으로 그를 또는 그녀를 바라보자. 상대방이 꼭 나르시시스트가 아니더라도, 그 관계가 건강하지 않다면 나와 상대방 둘 다를 위해서 관계를 재고하는 것이 장기적 관점에서 낫다는 것을 명심하자.

내가 너무 지쳤을 때 먼저 이별을 고한 적이 있다. 그는 계속 불행해 보였고 불만에 싸여있는 듯했다. 나는 재차 내가 그를 불행하게 하는 원인인지 물었고, 그는 그렇다고 했기에 내가 떠나 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는 돌아가신 아버지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이 사랑한다고 표현한 사람들은 다 얼마 안 가 자기를 떠나갔다며 나에게 사랑한다는 표현을 태어나 처음으로 했다며 후회한다고 했다. 나는 너무나 죄인이 된 것 같아 사죄에 사죄를 했다. 그는 상대방이 불행하다고 하면 좋은 연인은 곁에서 어떻게든 행복하게 만들어주려는 노력을 더하지 떠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며 나를 비난했다. 나는 그 이후 그가 불행하지 않게 갖은 노력을 했다. 더 이상 나에게 사랑한다고 하지 않아도 내가 자초한 일이라며 이해했다. 하지만 그는 내가 불행해할 때마다 표정이 그게 뭐냐는 투로 비난했고, 어떠한 위로도 제공해주려 하지 않았다. 좋은 연인은 곁에서 어떻게든 행복하게 만들어주려는 노력을 하는 거라던 그는 절대 좋은 연인이 아니었다. 아마 그의 뇌 안에서는 그렇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제 나에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했든, 그의 후버링이 어떻게 돌아오건 이제 나는 흔들리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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