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박 밥 챙겨 드세요.
지금 친정집에는 어머니만 계신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서울로 대학을 간 오빠를 따라 이사를 왔다. 현관문을 열면 한눈에 구조가 다 보였다. 요리하고 밥만 먹을 수 있는 부엌, 각자 작은 방이 한 개씩, 화장실이 하나 있었다. 돈 벌고, 공부하고, 노느라, 바빠 지내는 게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친구들을 초대할 때는 왠지 부끄러웠다. 친구가 오기 전에 신발장을 정리하고, 모든 이불을 개켜 장에 넣었지만 평수를 넓힐 수는 없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혼자 호주로 떠났다. 언제 돌아올 거냐는 어머니의 질문에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좋은 아파트로 이사 가면, 거실에는 소파가 있고, 방에 내 침대가 있으면." 솔직하게 자유로운 호주 생활이 좋다고 하면 좋았을 것을, 나는 기억도 안나는 농에 어머니는 며칠밤을 괴로워하셨다. 그러다 운 좋게 공공분양에 당첨됐고, 어머니는 전화로 기쁜 소식을 알렸다. "다 네 덕에 들어갔다"는 설명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화장실 2개에 거실도 있는 25평 아파트에 어머니, 오빠, 내가 살았다. 평생 이렇게 지낼 줄 알았다. 5년쯤 지났을까, 두 살 터울인 오빠가 먼저 짝을 찾아 떠났다. 나도 반려자를 만나 새 둥지를 마련했다. 다들 결혼 못한다, 안 한다, 걱정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인생의 정석대로 흘러갔다. 그리고 그 큰 집에 어머니만 남으셨다. 우리는 떠나기만 하면 되는 줄 알고, 즐거운 마음으로 떠났다. 어머니가 아프실 줄도 모르고.
서울의 동쪽과 서쪽 끝으로 서로 멀어졌다. 자식들에게 폐 끼치고 싶지 않다고 이사도 거부하셨다. 그래서 가족 모임이 있는 날은 앞뒤로 우리 집에 더 머무르시게 했다. 금요일에 첫째와 같이 장애인 콜택시(이후 장콜)를 타고 우리 집에서 하루, 가족 모임을 보내고 또 하루,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일요일까지 지내다 다시 장콜을 타고 집으로 가셨다가 다음날 돌보미 선생님이 아이를 데려갔다.
그날은 3.1절이 있어 금요일에 오빠네서 모이기로 했다. 오전 11시 이후에 가기로 했는데 장콜이 너무 일찍 잡혔다. 콜을 부르고 승차하려면 보통 한 시간 정도는 기다려야 되는데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오전 9시도 안돼 잡혔다. 당연히 오빠네는 준비가 안 됐을 터. 부랴부랴 행선지를 우리 집으로 바꿨다. 여기도 준비가 안된 건 마찬가지이지만 아무래도 및 낯을 공개하기에는 살림을 책임지는 딸 집이 낫다고 생각했다. 오빠도 동의했다가 다시 연락이 왔다. 새언니는 어머니가 기분이 안 좋으실 것 같다고 그냥 오시는 게 낫겠다고 했지만 이미 방아쇠는 당겨졌다. 예상대로 어머니는 기분이 상하셨다. 아들딸집 가는 것도 눈치를 봐야 되냐고.
어머니에게 열심히 사정 설명을 했다. 다 내 탓이오. 어떻게 겨우 기분을 풀어 드리고, 시간에 맞춰 오빠집으로 갔다. 마트에서 사 온 회와 밀키트도 있었지만 신경 써서 준비한 티가 났다. 예전에는 자주 만나 자매처럼 지내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지금은 부담이 되지 않는 사이여야 된다는 마음이 더 강해 거리는 더 가까워졌지만 특별한 행사가 있는 날 위주로만 만나고 있다. 아쉬우면서도 고맙고, 미안하고, 어려운 관계이다.
저녁까지 얻어먹고는 집으로 와 당연히 하루 더 주무시고 가시라고 했다. 혼자 계시니까. 하루 정도는 더 어머니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렇다고 딱히 활발한 대화나 별다른 정을 나누지는 않지만. 다음날 아침, 건강한 야채 주스를 만들었는데 못 먹겠다 하신다. 어제 너무 많이 먹어 입이 아프다고. 아니, 다 갈아서 씹을 것도 없는데. 꼭 아프다고 떼쓰는 애 같았다.
곧 점심을 준비했다. 이틀 전에 미리 식단을 짜서 장을 봐두었다. 찬밥이 남아 있었지만 찹쌀이랑 강황가루를 추가해 밥을 다시 지었다. 평상시에 못 드시는 된장 삼겹살구이, 씹기 편한 두부와 생선 전, 명란을 넣은 계란찜, 버섯볶음, 지난번에는 대접하지 않은 메뉴들이었다. 맵지 않고, 부드러운 것들. 혼자서는 먹는 재미도 없으실 텐데, 지금이라도 한 입 더 드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식탁 위에 밥이 차려지고, 가족들을 불렀다.
"나 졸려~" 먼저 식탁 의자에 앉은 둘째가 휘청거린다. 낮잠을 안 잔 지 1년이 넘었는데, 갑자기? 남편은 방에 누워 있으라고 아이를 보내고. 방에서 어머니가 나왔다 한마디 하고는 다시 들어가신다. "입 아파서 못 먹는다니까." 남편과 나만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나는 수저를 뜨려다 말고, 둘째 방으로 달려 들어갔다. "왜 멀쩡하다, 밥 먹기 싫으면 먹지마. 나도 요리 안 해. 나도 하고 싶어서 하는거 아냐. 기껏 한 시간 동안 해놨더니, 점심이고, 저녁이고, 알아서 해. 위나 아래나 뭐 하는 거야?!"
그랬다. 영재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어머니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어머니에게 처음 선보였던 요리는 맛이 없었다. 어머니는 진실되게 실망하셨고, 그 뒤로 매일 하는 요리인데도 손님이 올 때면 긴장을 많이 했다. 백개가 넘는 레시피를 핸드폰에 쌓아 두고는 혹시나 실수할까, 실패할까, 재차 확인을 했다. 내가 차린 요리는 엄마로서, 주부로서 평가받는 자리였다. 두 명의 평가원이 맛도 보지 않고 탈락을 선언했다.
내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평가원들이 다시 나와 밥을 다 먹고 치울 때까지도 나가지 않았다. 남편이 문을 두드렸다. 어머니 가신다고, 영재랑 같이 모셔다 드리고 오겠다고. 마지못해 나가 눈도 안 마주치고 배웅을 했다. 현관문이 닫히기만을 기다렸다. 철컥. 띠리리. 문 잠기는 소리에 맞춰 엉엉 소리 내 울었다.
집에 성한 사람이 없다. 첫째도. 둘째도. 엄마도. 나도. 기껏 밥 한 끼에 서러워 목놓아 울었다. 그나마 밥투정 안 하고 잘 먹어주는 남편이 있어 어찌나 다행인지. 눈치도 빨라 밖에서 아이와 같이 저녁까지 먹고 들어왔다. 내가 괜히 철없이 큰 집으로 이사 가자고 해놓고서는. 생각해 보니 내가 문제의 시초인가 보다.
"거실 없는 집도 좋으니 우리 엄마 밥 좀 드시게 해 주세요. 부디 건강하게 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