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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초롱 Mar 15. 2024

상담이 끝난 1년 이후

나는 아주 잘 살고 있다

5개월간의 상담이 종결됐다. 아니, 내가 종결을 요청했고, 선생님도 동의했다.


"선생님, 남편은 계속 다니자고 하는데, 저는 이제 정말 괜찮거든요."

"네. 많이 달라지신 것 같아요."

"사실 어렸을 때의 어떤 경험들 때문에 계속 힘들어 했는지까지는 잘 모르겠어요. 근데 몰라도 될 것 같은 기분이랄까. 모든 의문점들이 풀릴 때까지 다니는 게 맞을까요?"   

"아니오. 괜찮아요. 일상으로 돌아가셨다가 다시 힘들어지면 그때 또 오시면 되죠."

"이 시간이 그리워질 것 같긴 해요. 오늘은 할 이야기가 없다고 생각하고 왔는데, 어느새 한 시간이 흐르는더라구요."

"상담자님이 잘 받아들이셨어요. 앞으로도 잘하실 수 있으세요."

"네, 감사합니다. 저 또 올게요."


매일 눈뜨는 게 고통스러웠다. 자책과 분노로 무기력했고, 틈만 나면 죽고 싶었다. 도저히 사람들 곁에 있을 수 없어 죄 없는 남편에게 갈라서자고 했다. 어떻게든 집안을 일으켜보고자 고군분투하던 내 사랑은 서운함을 넘어 좌절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도 나를 붙잡아줬다. 상담을 알아봤다. 남편이 마지막 지푸라기를 내게 내밀었다. 기껏 말하는 게 무슨 도움이 된다고.


매주 한 번씩 센터를 갔다. 말하는 문장마다 상담사는 "왜죠? 어떤 기분이죠?" 묻는데, "저도 모르겠어요."라는 답변은 통하지 않았다. 뱉어낸 단어들 안에 숨겨진 진짜 이유를 찾아야 한다. 나를 괴롭혔던 감정들은 어제, 오늘, 또는 첫째가 아프면서 생긴 것들이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 내가 태어나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갖기 시작했을 때부터 일어난 일들, 원부모와의 관계, 몇 사건들로 인해 나는 쓸모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 속에 실수하면 안 된다고 다그치고 있었다. 학생 때는 공부만 하는 모범생이었고, 사회에 나가서는 흠 없는 직장인이 되어야 했고, 엄마가 돼서는 양육과 일에 성공해야 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역할에 충실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첫째가 아팠고, 멀쩡한 둘째도 내 뜻처럼 되지 않았다. 기저귀 하나 못 떼서 쩔쩔매고 있었으니까. 적절한 훈육이나 사랑을 표현하라는 이론은 알겠는데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다. 눈에 잡히는 대로 회초리가 되어 맞았던 어린 시절 내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나도 앞에 있는 아이를 때리고 싶다고, 손이 부들 떨렸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잊고 있던, 유리병에 가둬둔 내면의 아이가 깨어났다. 누군가를 탓하고 싶지 않다. 그 시절은 그랬을 테니까. 그분들도 아픔을 겪고 컸을 테니까. 작은 아이가 몸만 커버린 나에게 화를 낸다. 잘 숨어 있던 나를 깨워두고, 왜 또 외면하냐고.


상담은 그 아이를 만나는 시간이었다. 왜 힘들었는지. 지금은 어떤지. 힘들었겠구나. 이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아 보겠다고. 우리는 서로를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생각보다 빠르게 친해졌다. 상담하는 동안 많이 울었다. 매번 끝나고 나올 때는 속이 개운했다. 묵은 때를 벗겨 낸 것처럼. 다시 부정적인 감정들이 고개를 들어도 바로 쳐다볼 수 있게 되었고, 주변에 도와달라고 요청할 수 있게 됐다. 감정에 휩싸이는 순간이 있지만 회복하는 시간이 짧아졌다.


매일이 선택의 연속이지만 더 이상 남편이나 아이에게 미루지 않는다. 고민해 보고, 맞다고 생각하는 것을 실행한다. 아이의 하루도 내가 정해 본다. 내 삶을 너무 양보하지 않도록. 물론 여전히 옷을 고를 때는 남편의 의견을 묻는다. 색감에 둔한 나보다는 감각이 뛰어난 짝꿍의 눈이 믿을만하다는 건 변함이 없는지라. 그렇다고 '내 선택을 또 미뤘구나. 난 왜 이모양이지'라는 자기 비하는 없다.


한동안 거리를 뒀던 어머니와의 밀당도 즐기고 있다. 매사 부정적이고, 일방적인 분풀이에 전화하기가 힘들었다. 지금은 그래도 나를 사랑했다는 것을, 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영원히 서로를 이해할 수 없더라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마음껏 토로하기를. 그래서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지길 바라본다.


아직 풀지 못한 응어리도 남아있다. 종교에 빠져 산 용서 할 수 없는 아버지, 두 달 동안 인테리어하며 물난리 내고도 해결은 뒷전이었던 윗집 신혼부부, 장사한다고 매일 소리치는 상가 과일가게 등을 생각하면 똑같이 되갚아 주고 싶다는 복수심이 일어난다. 그들과의 관계나 나의 일방적 증오도 풀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잘 지낼 것이라 믿는다.


악취 나는 고인 물들을 버리고, 비어있는 자리를 독서로 채우고 있다. 청정수처럼 깨끗하다 때론 흙탕물이 되기도 하지만 물은 계속 흘러 더 이상 썩지 않는다. 똑같은 하루지만 더 이상 지루하지 않다.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하루가 즐겁고, 또 내일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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