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야 해가 뜨면 꽃이 피겠지
비가 오는 날은 유난히 게을러진다. 이제 남편은 출근하고, 아이는 등원해야 하는데 밤부터 내린 비가 끝도 모르고 추적추적 내린다. 우산 하나씩 챙겨 떠나보내고, 집 안을 서성인다. 해도 들어오지 않는 창가에 잠시 머물렀다 가방을 챙겼다. 책장에 몇 년간 꽂아만 뒀던 '두 번째 산’ 책과 빈 텀블러를 넣었다. 이런 날일수록 밖으로 나가야 한다. 언제 물에 젖은 솜뭉치 마냥 내 마음을 적셔 하루를 날려버릴 테니까.
집에서 5분도 안 되는 거리에 스타벅스가 있다. 누군가는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숍이라던지, 가격이 비싸다며, 꺼리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추억의 공간이다. 대학생이 되고 처음으로 발을 들인 커피를 만들고 파는 별다방에서 시험 공부하고, 연애도 하고, 스도쿠도 하고. 컵 위로 휘청거리게 올린 휘핑 아래 달달한 캐러멜 마키아또를 거쳐 바닐라 라떼로, 후에는 아메리카노로 자리 잡기까지 20년 세월을 함께 나눴다. 잠시 동네 카페 살리기에 참여를 해봤지만 몇 안 되는 자리를 차지하고 두세 시간 책을 읽고 있는 게 스스로 눈치가 보여 그만뒀다. 그래서 오늘도 사이렌 오더를 하고 텀블러 가득 커피 향을 채웠다.
교생 실습하며 인연을 맺은 은사님이 주신 책을 펼쳐봤다. 당시에 친정 집에 머물며 아픈 첫째를 돌보고 있었다. ‘두 번째 산'이라는 책 제목만으로도 선생님이 고심 끝에 고르셨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일 년에 한 권을 읽을까 말까 하는데 책 두께며 빼곡히 적혀있는 작은 글씨 때문에 선뜻 손이 안 갔다. 지금은 곁에 책을 둔지 1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집중하기 쉽지 않았다. 선생님이 전하는 말씀이라는 생각으로 꾸역꾸역 다음 장을 넘겨본다.
나는 항상 잘 살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마당이 있는 2층 집에 통창으로 햇볕이 들어오고, 비밀의 방도 있는 곳을 사려면 돈이 꽤 필요할 테니까. 그 성공의 첫 번째 산을 다 오르기도 전에 희생과 나눔이 있는 두 번째 산으로 강제 순간 이동을 했다. 왜 하필 내 아이였을까, 내가 무슨 대역죄를 지었나, 원망하고, 좌절했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2년 뒤에 태어난 아이가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다. 하찮던 내 삶도 소중해졌다. 내가 건강하게 오래 살며 돌봐야 할 생명들이 생겼다. 그들에게 올바르게 사는 게 뭔지 본보기가 되고 싶다.
이 세상에 내가 제일 불행한 줄 알았는데,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고통이 찾아온다. 그러니까 이렇게 책으로 알려 주는 거겠지. 너 혼자가 아니야. 이미 많은 사람들이 겪었고, 또 극복했어. 그래서 성장할 수 있었다고. 물론 그런 아픔의 결과로만 얻어야 하는 성장이라면,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채 속물적으로 즐기다 가고 싶은 심정이지만, 그건 신의 영역이었다.
나머지 이야기를 뒤로 한 채 집으로 향했다. 아직도 비에 젖은 흙내음이 진동한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나 눈이 싫다고 한들 멈춰지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태풍이 몰아치고, 벼락도 친다. 사건들은 어느 날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와 도저히 막을 방도가 없다. 그저 지나가길 바라야지. 곁에 우산이라도 있으면 감사히 우산을 펼치고, 옷깃을 여미고. 기다리다 보면 햇볕 쨍한 날이 온다. 일곱 빛깔 무지개 밑에서 옷을 말리고, 꽃을 피울 수 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