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디테일이 깃든 작은 예술
스페인의 작은 섬에서 태어난 비올레타 로피즈의 그림책 《할머니의 팡도르》에는 처음 빵맛을 본 죽음의 사신이 그 맛에 반해 자기의 본분을 잊고 몇 번이나 할머니의 저승길을 유예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신이 처음 할머니를 방문했을 때는 크리스마스 빵에 넣을 소를 만들 시간이 필요하다는 할머니 말에, 두 번째는 동네 아이들이 기다리는 누가(꿀과 견과를 섞은 이탈리아 과자) 반죽이 바삭해지려면 하룻밤 식혀야 하기에, 세 번째는 크리스마스 날 먹을 팡도르를 완성해야 한다는 말에 빵맛을 알아버린 사신은 그만 마음이 약해져 매번 빈손으로 할머니 집을 떠난다.
개성이 넘치는 그림책《할머니의 팡도르》에 나오는 빵 못지않은 맛있는 빵을 만드는 가게가 우리 동네에는 있다. 바로 ‘우리동네식빵’. 국적 불명의 외국어로 분칠 한 빵집 이름이 넘치는 요즘, 이름마저 너무나 소박하다. 아무것도 내세우지 않는다. 빵집 이름은 빵을 만드는 사람의 철학을 담고 있다. ‘우리동네식빵’은 식빵만 판다. 매일 오후 ‘우리동네식빵’에 가면 갓 구운 빵을 만날 수 있다. 가게 근처를 지날 때면 갓 구운 맛있는 빵 냄새가 혀의 감각을 유혹하는 바람에 그예 가게에 들어가게 되고 빵을 사게 되고 만다. 이곳에 한번 발을 들여 빵을 맛보면 중독이 되어 다른 빵집의 빵을 먹을 수 없게 되는 부작용(?)이 생긴다.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나오는 “단지 팔기 위해 허겁지겁하는 노동이 아니라, 실생활에 필요한 좋은 물건을 만들기 위한 공들인 노력, 그리하여 일상의 디테일이 깃든 작은 예술과 그 아름다움이야말로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는 저자의 말은 마치 ‘우리동네식빵’을 염두에 두고 한 말처럼 들린다.
사실 ‘우리동네식빵’의 맛은 특별하다고 할 게 없다. 그저 충실하게 만든 식빵의 맛인데, 그렇게 빵의 본질에 충실하게 만든 빵이 세상에는 많지 않다. 그러하기에 ‘우리동네식빵’의 빵맛은 매우 특별하다. 그 맛의 특별함은 아주 작은 차이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매우 특별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주 작은 차이를 알아차리는 사람이고, 사실은 모든 일에서 아주 작은 차이가 그냥 아주 작은 차이가 아니라 오랜 경험과 철학과 기술이 결합되어 이루어지는 결코 작지 않은 ‘큰 차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우리동네식빵’엔 단골이 많다. 일산 어디를 돌아다녀보아도 ‘우리동네식빵’처럼 주인이 직접 반죽하고 숙성 시켜 매일 빵을 구워내는 빵가게는 드물기 때문이다. ‘우리동네식빵’의 빵에는 요란함이 없고, 과장이 없고, 자기를 알아봐 달라고 애원하는 것이 없다. 그저 식빵 본연의 맛에 충실할 뿐이다. 그것이 인생의 핵심이 아닐까.
산책을 나가 길을 걷다 ‘우리동네식빵’ 을 지나다 보면 오누이 같기도 하고 부부 같기도 한 남자와 여자가 빵을 만들기 위해 늘 분주하게 움직인다. 다시 매력적인 그림책 《할머니의 팡도르》로 돌아와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크리스마스 팡도르를 만든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신만 아는 빵의 레시피를 찰다(길쭉하고 속이 빈 이탈리아 간식) 속에 넣어두고 떠난다.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남긴 찰다를 먹던 아이들은 그 레시피를 발견해 맛있는 할머니의 빵을 스스로 만들어 먹으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혹시 ‘우리동네식빵’도 팡도르 할머니가 찰다 속에 숨겨둔 그 비밀의 레시피를 엿본 것일까.
“일상의 디테일이 깃든 작은 예술과 그 아름다움이야말로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그것들이야말로 우리의 노동을 즐길 만한 것으로 만들 것이다. 구원은 비천하고 무의미한 노동을 즐길 만한 노동으로 만드는 데서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