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카레 Aug 18. 2023

화가입니다, 일단은.

내가 미쳤지, 정말.


* 커버로 사용된 사진은 제가 이전에 했던 작업입니다. 허가되지 않은 사용을 금합니다. *


 제 본업은 화가입니다. 주변 사람들 이외에는 아무도 모르지만, 어쨌든 전시를 한 번 했으니 화가라고 떠벌일 최소한의 자격은 갖추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전시를 한 지도 어느새 2년 반이 넘었더랬지요. 꽤 긴 시간을 혼자 작업실에 틀어박혀 있었고, 지금은 거의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은 사람들에게만 작업을 보여주면서 살고 있답니다. 물론 그들에게서 그렸다면 보여주어라, 일단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어라! 하는 말을 수없이 들어 왔습니다. 머리로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2년이 넘도록 결국 그럴 수 없었던 이유는 제가 왜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무엇을 그리고 싶은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하지 못하고 방황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만족이 어려우니 쉽사리 남에게 보여줄 수 없었고요.




 완벽하게 만족할 만한 작품을 세상에 내놓은 사람은 없다고들 말합니다. 단지 평생 만족에 가까이 다가갈 뿐이라지요. 하지만 저는 그 정도가 좀 심한지, 아니면 애초에 너무 생각 없이 이 길에 들어선 것인지 계속 시작만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작업 방식이 길면 6개월, 짧으면 3개월에 한 번씩 바뀔 정도로요. 예를 들어 이전에 했던 처음이자 현재까지 마지막인 개인전 때도, 작업들 설치를 끝내고 뒤로 물러서서 전경을 둘러보자마자 바로 한숨이 나왔더랍니다. 꽤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투자한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힘이 부족했거든요. 공간에 작업들이 잡아먹힌 것은 당연지사요, 전부 완전히 틀에 갇혀서 경직되고 진부한 그 광경이라니! 그날은 헛웃음만 지으며 친구들과 술을 잔뜩 들이켰답니다. 그 후 전시 철수가 이루어지자마자 저는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했지요.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방식을 선택해서 열심히, 꾸준히 작업을 하거나 전시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기 그지없습니다. 어떻게 다들 그토록 흔들림 없이 자기 길을 걸어가는지, 아둔한 제 입장에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요. 그나마 지금은 근 1년 정도 같은 방식을 취해서 작업을 하고는 있지만, 물감을 워낙 많이 사용해야 하는데다가 분명 어딘가 어긋났음에도 도대체 어디서 잘못된 부분을 찾아야 할지 알기 힘든 방법을 택했는지라 매일 끙끙거리고 있답니다. 한 부분을 그리고 나서 실수했음을 깨닫고 나면 다른 부분을 또다시 건드려야 하지요. 돈은 돈대로 줄줄 새고, 돈을 쓴 만큼 벌어야 하니 일하는 시간이 작업하는 시간보다 훨씬 길며, 무언가 결과물이 나와 주면 위안이라도 될 텐데 딱히 그런 상황도 아니니 아주 혼란스럽습니다. 무명 화가, 아직 제가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지 혹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조차 불확실한 젊은 녀석이 바로 제 초상입니다.

 

 당장 때려치울까 하는 생각을 하루에 최소 3번은 하는 것 같으니 1년이면 거의 1000번이군요. 하지만 아무리 입 안에서 그만두겠다는 말이 달싹거려도 결국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제가 그림을 그리는 일을 정말 좋아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처음 그림을 그리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전율을 일으킨 작품을 보았을 때를 여전히 잊지 못하는 이유도 그러하겠지요.




 군대에 있었을 적으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병장 계급을 달고 난 뒤 여기서 나가면 대체 무엇을 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복학을 하더라도 전공과 잘 맞지 않아서 관련 공부를 더 지속하고 싶지는 않고, 어영부영 취업을 준비하느니 차라리 후회할 때 하더라도 무언가 가슴을 뛰게 만드는 일을 해 보기로 했지요. 그러던 중 전역을 얼마 남기지 않은 어느 주말,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던 중 머릿속에 콰콰쾅 하고 천둥이 치는 듯한 느낌이 들더랍니다. 반드시 그림을 그리겠다는 다짐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야 말겠다는 확신,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충격이 저를 침대에서 벌떡 일으켜 세웠지요. 물론 그때의 어리고 무모했던 저에게 지금의 제가 무전을 보낼 수만 있다면 제발 한 번만 더 생각하라고 애걸복걸할 터입니다. 전역만 한다면 무엇이든지 극복할 자신이 있는 말년병장이 아닌, 곧 냉정한 사회와 부딪히게 될 사람 1명이라는 입장에서 고민해 보라고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떤 말을 해도 화가가 되겠다는 선택이 결코 달라지지 않았을 것임은 잘 알고 있습니다. 어디서부터 그런 결심이 나왔는지는 분명치 않아도 그때의 감정을 되돌아보라면 조금도 어긋남 없이 상기할 수 있을 정도니까요. 운명이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만약 있다면 생의 얼마쯤 혹은 전부를 그림에 투자하기로 계획되어 있는 모양입니다.


 그로부터 2년쯤 뒤, 짬을 내어 리움미술관 상설전시를 보러 간 일이 있었습니다. 세계 유수의 작가들의 작품이 잔뜩 있어서 이곳저곳을 신나게 들쑤시며 감상했지요. 한참 돌아다니다가, 저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방 안의 인물>이라는 작품 앞에서 홀린 듯 멈춰 섰습니다. 고통 없는 테이저건이라도 맞은 듯 온몸이 저렸기 때문이었지요. 베이컨의 작품을 도판으로는 본 적이 있었지만 실제로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는데, 그야말로 입이 딱 벌어진다는 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경험이었답니다. 단순하고도 깊은 색으로 처리된 배경 위에 두꺼운 물감으로 난폭하게 칠해진 인물은 이상하게 뒤틀린 자세로 누워, 입을 애매한 크기로 벌리고 으르렁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림 안에서 인물이 차지하는 부분이 크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인물이 내는 소리가 화면을 넘어 미술관 전체를 채우는 듯했지요. 그 힘! 주변 작품들과 사람들,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 짓눌러 버릴 듯이 강한 힘! 마치 블랙홀 앞에 선 듯한 느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귓속에서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 웅웅거리는 느낌은 그 작품을 실제로 보아야만 알 수 있습니다.


 특히 허벅지 부분에 칠해진 물감은  제게 경악을 넘어 좌절을 불러일으켰답니다. 뒤에 다시 말하겠지만 저는 그때까지 그림과 대상을 닮게 그리는 일에만 천착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물감을 두껍게 휙 묻히는 것만으로도 피부와 근육을 넘어선 존재 그 자체를 표현할 수 있다니! 제가 알고 있던 미술을 넘어서는 것도 모자라 죄다 부수어 잘근잘근 밟아 버리는 듯했지요. 저는 그 앞에서 무려 40분을, 공포와 존경심으로 덜덜 떨면서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거짓말처럼 들리실 수도 있겠지만 어느 정도 가슴이 진정될 때까지는 도저히 발을 뗄 수가 없더군요.

 

 지금까지 제가 해 왔던 작업들은 <방 안의 인물>을 빼면 설명할 수가 없어요. 주제나 소재는 전혀 다르지만요. 그 힘을 표현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애써 외면하고 다른 길로 피해 다니거나, 어설프게 따라하려다가 되려 호되게 실패를 맛보는 일도 많았답니다. 지금이야 나이가 조금 더 들어 회피나 모방은 방법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지만요. 그래도 8년 가까이가 지났음에도 아직 똑같은 마음가짐으로 당시의 감정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그 경험을 잊지 않고 저만의 그림에 적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겠지요. 애초에 베이컨과 같은 불세출의 천재가 도달한 경지를 넘볼 수는 없고, 그저 조금씩 아득바득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제 작업에도 조금이나마 만족할 만한 힘을 불어 넣게 될 것이라 믿을 뿐입니다. 오늘도 여전히 저는 <방 안의 인물>에 다가가려 애쓰고 있습니다.



 

 아무튼 그림 그리기를 빼면 제 자신을 무엇을 통해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말로는 관둔다고 수없이 중얼거려도 포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거니와, 포기하기에도 늦어 이제는 정말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기도 하고요. 여기서부터 저는 화가로서의 제 자신에 대한 이야기들을 해드릴 예정입니다. 그동안 겪었던 일들과 작업에 대한 저만의 관점, 그림 그리기에 관련된 시시콜콜하고 쓸데없는 정보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등등을 가감없이 말씀드릴 계획이지요. 글들은 순전히 경험들을 털어놓으면서 제 앞에 놓인 길을 더 잘 보기 위한, 자신을 돌아본 다음 이전의 생각들을 정리해 보기 위한 내용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다소 이기적인 글이 되겠지만 사람이 때로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기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디 이야기만큼 정기적으로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무엇이 되었든 일단 시작해 보겠습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