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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잔 Oct 10. 2023

갑자기 숨통 트이기

 살면서 '갑자기' 무언가를 해내고 싶을 때가 있다. 계획형 인간인 나에게 '갑자기'는 그 자체로 하나의 도전 행위다. 사소한 것이라도 충동적인 마음으로 행할 때의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저 그런 하루를 마무리하던 10월 초의 어느 밤, '갑자기' 바다에 가고 싶어졌다. 사실 바다에 대한 마음은 언제나 내제되어 있다. 하지만 종종 그 마음이 툭툭 올라올때가 있다. 최근 들어 즉흥적인 행위를 즐기게 된 나는 예전보다는 작은 용기로도 충분히 속초행 버스를 예매할 수 있게 됐다. 그렇게 나는 이틀 뒤 속초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한글날 연휴여서인지 버스가 예정 시간보다 늦게 도착했다. 다시 강조하지만 계획형 인간인 나는 이런 변수에 취약하다. 특히 당일치기 여행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즐기기로 했다. 별다른 목표나 계획 없이 출발했기에 몸과 마음을 더 가벼이 할 수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예전부터 저장해두었던 하마식당으로 향했다. 혼자 식당에 가면 다양한 메뉴를 먹을 수 없음에 아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들어서니 별 걱정 없이 17000원짜리 후토마키와 8000원짜리 크림 고로케를 주문했다. 분명 다 못먹을 것을 알았지만, 25000원의 점심을 나에게 선물한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5피스의 후토마키는 마치 형형색색의 오총사 같았다. 우람한 자태를 뽐내며 내 입으로 들어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 입에 다 넣지 못하는 것은 후토마키에 대한 예의가 아닌걸 알면서도 크기에 압도당해버렸다. 결국 10번에 나눠 그들을 정복하는데 성공했지만 크림고로케는 끝끝내 정복하지 못했다.



 불어난 배만큼 든든해진 마음으로 차를 빌려 카페 루루흐로 향했다. 그런데 가던 중 지금 날씨라면 루루흐보단 스테이 오롯이가 더 좋겠다! 싶어 차를 돌렸다. 이 순간 또 한번의 숨통이 트였다. 들뜬 마음으로 도착한 오롯이에는 이미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널찍한 공간과 뷰 덕분인지 전혀 답답하지 않았다. 시그니처 라떼를 시키고 중정을 볼 수 있는 구석에 앉아 공간을 즐기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커플, 가족, 썸남썸녀들이 가득했다. 이 곳은 누군가와 같이 했을 때의 행복감이 더 클 것 같아 빠르게 다음을 기약하고 루루흐로 향했다.






 루루흐에 도착한 순간, 바다보다 더 큰 환기구를 찾은 기분이었다. 라이브 포토 소리조차 크게 들릴만큼 조용한 무음 공간. 소리라곤 스피커에서 나오는 피아노 소리와 사장님이 싱크대에서 설거지 하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공간을 온전하게 즐길 수 있는 시간. 널찍한 공간에 넉넉히 배치되어 있는 테이블, 차가운 철제 트레이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화분들까지. 오렌지색 바닥 타일과 흰 벽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원목 책장. 오후 5시의 길다란 노을빛. 정성스레 내어주신 드립커피 한잔. 조금이라도 지구에 덜 해로운 방법을 실천 중인, 소음에 방해받지 않는 조용한 공간으로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는 이들을 응원하는 곳. 짧은 당일치기 여행을 꽉꽉 채우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7000원으로 이렇게나 값진 숨을 얻어갈 수 있음에 감사했다. 오래도록 좋은 공간을 유지해달라는 인사와 함께 바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생각보다 관광객이 많았던 탓에 인적이 드문 해변을 찾던 중, 봉포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이제는 지도만 봐도 한적한 바다를 찾을 수 있게 되었나보다. 나처럼 혼자 또는 둘이서 쉼을 목적으로 온 것 같은 이들이 대부분이어서 마음 놓고 돗자리를 펼쳤다. 파도가 나를 적시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서 자연의 소리를 귀담아 들었다. 신발을 벗었다. 맨발로 모래의 촉감을 느꼈다. 가방에서 '노르웨이의 숲'과 노트를 꺼냈다. 책 표지와 바다와 신발과 모래사장을 한 프레임 안에 담았다. 노트에 내가 바라본 풍경을 끄적였다. 책을 펼쳐 잠시나마 읽어보았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를 마주하는 구름 여럿을 담았다. 점점 차가워지는 하늘을 수직으로 바라보기 위해 가방을 베개 삼아 드러누웠다. 스테레오 사운드로 파도 소리를 들었다. 선우정아의 '그러려니'를 틀고 바닥에 바짝 붙은 채로 파도 치는 바다의 움직임을 담았다.






 두둥실 '갑자기' 떠오른 바다에 대한 마음이 우연을 가장해 단계를 밟아가며 나의 숨통을 열어주었다. 아무리 바쁘고 정신 없어도 시간 내어 숨통을 열어주니 다시 열심히 살아갈 마음이 생겼다. 충전 필요 없이 꾸준한 에너지로 나아갈수만 있다면 참으로 좋겠지만 완급조절이 필요한 인간이기에 하루정도는 멈춰있어도 괜찮다. 인생 긴 데 옆이나 뒤도 돌아보며 그러려니 살아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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