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영화를 마치고 두 번째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을 때, 나는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했다. 분명 하나 완성했는데 그 경험은 온데간데없고 대체 영화라는 것은 어떻게 만드는 것인지 완전히 리셋된 것 마냥 처음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이렇게 아무것도 모를 수가 있나? 그래서 주변에 알고 지내던 감독들에게 물었다. 얼마나 더 하면 익숙해지는지, 그래도 감이라는 게 생기는지, 언제쯤이면 프로(?)처럼 숙련이 되는지 말이다. 그럴 때마다 모두 똑같은 대답을 했다. 늘 0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 같다고. 아무리 반복해도 마치 처음 하는 것처럼 어렵다고. 그 말은 무척 절망스러웠지만, 조금은 안심이 되고, 한편으로는 짜릿하기까지 했다. 나만 이렇게 헤매는 것이 아니구나. 그리고 늘 이렇게 처음 하는 것처럼 새롭다면, 절대로 권태로울 일은 없겠다 하며. 그건 싫증을 잘 내는 나에게 퍽 알맞아 보였다.
두 번째 영화와 세 번째 영화도 마찬가지로, 어떻게 이렇게 아무것도 모를 수가 있냐고 중얼거리며 만들었다. 그렇게 단편 영화 두 개를 만들고 나니, 장편이 하고 싶어졌다. 당연히 알 수 없는 세계일 테지만 그건 뭐 늘 그래왔으니 익숙하다 생각하며 성긴 기획과 함께 촬영에 돌입했다. 그런데 어쩐지 이번엔 촬영부터 너무도 막막하고 무서웠다. 여태 껏의 두려움과 확연히 달랐다. 이전의 두려움에는 영화를 만드는 행위에 초점이 가 있었다면 이번엔 영화를 만드는 나에 초점이 가 있었다. 문제는 ‘대체 어떻게 영화를 만드는 거지?’에서 ‘대체 어떻게 내가, 영화를 만든다는 거지?’가 되어 있었다. 이전에 만든 영화를 보고 작업노트를 뒤져 봐도 한 컷도, 한 문장도 믿을 수가 없었다. 거기엔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이 있었고 시퍼렇게 살아있던 감각과 한치도 어긋남 없이 붙어있던 영혼과 시선이 남아있었다. 아무리 봐도, 지금의 나와는 너무 달랐다. 나는,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나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 두려움에 많은 밤을 울었다. 다시는 영화를 할 수 없을까 봐. 다시는 그렇게 생생하게 깨어있던 나를 만나지 못할까 봐. 긴 긴 밤들이었다.
시린 겨울을 나고 봄을 맞듯 상실의 시간을 보낸 후 소생의 시간이 왔다. 작은 집을 지으며 나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고 더 이상 일상이 버겁지 않게 되었다. 한 번은 누군가로부터 집을 짓는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보면 어떻겠냐는 말을 들었다. 그러고 싶은데 아직 잘 모르겠다고 말하며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때 같은 자리에 계시던 손 작가님은 나의 심란한 마음을 알아차린 듯, 따뜻한 말을 건네셨다.
‘해도 좋고, 안 해도 괜찮아. 네 삶이 곧 너야. 너를 증명하지 않아도 돼.’
나는 이 말을 두고두고 꺼내봤다. 내 존재의 이유를 묻고 싶어 질 때마다. 내 삶의 증거들을 찾아 나서고 싶어질 때마다.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알아보지 못했다. 아직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내지 못했으니 ‘영화를 만들던 나’가 아직 남아 있는지, 정말 사라져 버리고 없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지금도 문득 두렵다. 세계를 모두 허물고 다시 짓는 과정에서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달라진 것은 아닌지. 그래서 ‘영화를 만들던 나’를 나도 모르는 새에 놓쳐버린 건 아닌지. 하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을 한다. 잃은 내가 있다면, 분명 얻은 나도 있을 거라고. 만약 푸른빛의 세계를 잃고, 하늘빛의 세계를 얻었다면 이제는 그 하늘빛 세계를 기꺼이 껴안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고. 어쩌면 조금은 무디고 옅어졌을지언정 그것 또한 나로 인정하고 싶다고.
해도 괜찮고 안 해도 괜찮다는 손작가님 말처럼,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다는 어떤 시의 구절처럼,
잃었어도 괜찮고, 잃지 않았어도 괜찮아.
잃었으면 잃은 채로 영화를 하면 되고, 잃지 않았어도 그것으로 또 영화를 하면 된다. 그냥, 그러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