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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짓는사람 Jan 10. 2024

어떤 전환

내가 가장 멋졌던 순간.

  작년 한해동안 나는 작은집건축학교에서 스텝으로 일했다. 7박8일간 16명의 사람들이 모여 여섯 평 작은 집 한 채를 짓는 집짓기 수업의 보조강사가 된 것이다. 한달에 한번 열리는 이 강의는 생각했던 것보다 체력면에서 꽤 많이 힘들었다. 특히 유독 더웠던 작년 여름, 7월 말에 시작한 70기 수업 때는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이러다 탈진하는 거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에어컨은 커녕 선풍기도 두 대밖에 없는 열악한 작업장.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반까지 진행되는 강도높은 수업. 돈을 받고 한다해도 뛰쳐나갈 만한 상황인데 돈까지 내고 이 고생을 하다니. 하지만 수강생들은 찡그린 표정 하나 없이 모두들 즐거워보였다. 하나라도 더 알고 싶어서 눈을 반짝이며 질문하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결코 짜증을 내거나 게으름 없이 수없이 많은 피스를 박는 모습은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지독한 더위에 속옷까지 땀으로 흠뻑 젖었다. 스텝들끼리는 ‘우리 무슨 젓갈이라도 된 거 같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수강생들의 순수한 열정에 그 더위속에서도 즐겁게 일할 수 있었다.


  마침내 7박 8일의 마지막 날. 수업의 끝자락엔 늘 건축학교에서 만든 작은집 마을 투어가 있다. 학교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자크르 마을이다. 그곳엔 작은 집 열 채와 내가 얼마 전에 직접 지어 살고 있는 바퀴달린 집이 놓여있다. 강사를 막 시작했을 때, 작은집 마을을 둘러보던 수강생들이 우리집도 보여달라고 요청해서 처음에는 한 두번만 보여드리고 그만두려 했는데 어쩌다보니 일년 내내 모델하우스가 되었다. 이번 기수도 마찬가지였다. 여섯 평 밖에 안되는 작은 집이다보니 한꺼번에 모두 들어올 수 없어 서너 분씩만 차례로 들어와 구경을 했다. 어떻게 짓게 되었는지, 지어보니 설계상 아쉬움은 없는지, 시골 살이는 괜찮은지, 각자 궁금한 점을 질문하며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집을 둘러보셨다. 이럴 때는 혼자 사는 사적 공간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드려야한다는 부담감도 잠시 뒤로 하고 신이 나서 이야기를 하게 된다. 그렇게 마을 투어는 끝이 나고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집은 거의 완성되었고 수료식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에 작업장이 어수선했다. 나도 수강생들과 마을에 대한 이런 저런 감상을 나누고 있는데 어떤 분이 내 눈을 바라보고는 이렇게 말씀 하셨다. “선생님, 정말 행복해 보여요.”


  딱 1년 전 여름, 나는 매주 심리상담을 받으러 상담센터에 가곤 했었다. 길고 긴 우울와 무기력은 가깝게 지냈던 사람의 암투병 소식을 들은 후 극도로 심해졌던 것이다. 어느 날 상담 선생님이 물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도 하세요?” 나는 건조하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하루의 매 시간 매 초가 버거운 날들이었다. 하지만 죽을 용기는 없었다. 이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갈지 생각했다. 집을 짓고 싶었다. 집을 지어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해 11월, 나는 서울 생활을 모두 정리하고 제천으로 내려갔다. 제천에는 작은집건축학교가 있었다. 나는 1년 전에 집짓기과정을 수료 했었다. 학교에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혼자서는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학교의 도움을 받아 바퀴달린 집을 짓기로 했다. 그동안 모은 돈, 천만원을 가지고 내 손으로 직접 집을 짓기 시작한 것이다. 집짓기의 과정은 예상보다 지난하고 고됐다. 노가다 그 자체였다. 그라인더로 각관을 자르고 또 잘랐다. 피스를 박고 또 박았다. 단열재를 채우고 또 채웠다. 밤이 되면 온몸이 뻐근해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런데 그렇게 하루 하루를 채우다보니 어느 새 바닥이 생기고 벽이 세워지고 지붕이 올라갔다. 그뿐일까. 전기가 연결되고 불도 켜졌다. 아주 더뎠지만 무엇보다 선명하게 나는 무언가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건 바로 나의 집이었다.


  집을 짓기 전까지 나는 내가 왜 이토록 집을 짓고 싶어하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끊임없이 나를 짓누르던 잡념들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 몸을 괴롭혀 마음의 고통을 잊기 위해서, 도시와 사람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그렇게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하루하루 집을 지어가면서 알게 되었다. 나는 무너져있던 나를 차근히 다시 짓고 싶었다는 것을. 집을 지어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았던 막연한 생각은 제대로 살고 싶다는 간절한 생존 본능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바닥을 만들고 벽을 세우고 지붕을 올리는 과정 속에서 나는 문득 문득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뿌연 안개속과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모래밭 속에서 방향도 목표도 상실했던 나에게 내 손으로 직접 만지고 느낄 수 있는 물성 있는 재료들로 집을 지어가는 감각은 나를 그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현실에 발붙이게 해주었다.


  그렇게 추운 겨울 내내 나는 집을 지었고 작은 집 하나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는 제천의 작은 집 마을에서 시골 살이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작은집건축학교 스텝으로도 일하게 되었다. 학교에는 참 멋진분들이 많이 오셨다. 지역도 연배도 다양했다. 이유는 모두 달랐지만 언젠가는 직접 집을 짓고 싶다는 비슷한 꿈을 간직한 사람들을 가까이서 만나는 경험은 그 자체로 참 소중했다. 집을 먼저 한채 지어봤다는 이유로 강사가 되었지만 가르침보다 배움의 시간이 훨씬 더 많았다. 나는 그저 스스로 집을 짓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느끼게 해 드릴 수 있다면, 그래서 꿈을 이루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그 마음이 닿은 걸까. 지독하게도 무더웠던 여름, 70세의 나이로 70기로 왔다며 수업 내내 밝은 표정으로 최선을 다하던 분이 있었다. 그 분이 마지막날, 나에게 행복해보인다고 했을 때 나는 활짝 웃으며 감사하다고 인사했지만 가슴 속으로는 엉엉 울었다. 행복을 만났다는 안도감과 기쁨, 그리고 지난 날들에 대한 애틋함이 뭉쳐진 눈물이었다. 참 많은 날들이 스쳐지나갔다. 죽음을 생각하던 날들. 조금씩 살아지던 날들. 마침내 살게 되었던 날들까지. 만일 집을 짓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무얼 하며 살고 있을까. 아니, 여전히 살아 있었을까?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손에 임팩을 꼭 쥐고 집을 짓기 시작했던 나는 어느새 문득 문득 행복하다 느끼며 하루를 보낸다. 내 인생에서 이토록 멋진 전환이 언제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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