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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토부장 Jun 06. 2019

10. 헬싱키에 대한 몇 가지 단상

one-way ticket project #10 헬싱키


지난 2013년 뉴욕더블린→비엔나→프라하→모스크바를 거치며 한 달여간 지구를 동쪽으로 돌던 내 여행의 마지막 도시는 헬싱키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공부하던 시절 남들 다 다녀오는 헬싱키를 못 가봤던 아쉬움도 있었고, 여행을 마치기 전 북유럽 어느 한 곳 정도는 찍어보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헬싱키를 장시간 경유하는 항공편을 선택했던 거였다.

당시 헬싱키에는 고작 만 하루 정도 머물렀었지만 나에게 너무 신선한 기억으로 남았었다. 이토록 평화롭고 행복한 표정의 사람들로 가득한 곳이라니.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헬싱키라는 도시가 주는 묘한 끌림에 매료되어 버린 것이다. 정말 잠시나마 집으로 돌아가는 티켓을 바꿀까 심각히 고민까지 했었다. 그리고 헬싱키를 떠나며 다짐했다. 언젠가 이곳에 꼭 다시 한번 와보리라고. 그때는 나도 이곳 사람들 속에 섞여 한없이 여유로운 시간을 오랫동안 품어볼 거라고. 그리고 마침내 그때 했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 도시에 돌아왔다. 당시 생각했던 '언젠가'보다는 조금 빠르게 말이다.




사람마다 여행에 대한 다양한 기준과 가치관이 있겠지만 적어도 어느 한 곳을 이해하려면 최소 4~5일 이상은 머물러보아야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행이란 것을 처음 시작하던 때부터 그렇게 생각해왔다. 당연히 한 곳에 오래 머물면 머물수록 더 깊고 다양한 것들을 보고 느낄 수 있겠지만, 길어야 일주일 남짓의 여름휴가를 가지고 사는 우리네 일상에서 여행 중 그 이상의 시간을 누리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물론 나의 이 원칙에는 천성적인 게으름도 한몫한다. 바지런히 옮겨 다닐 스타일은 못됨으로... 요즘은 한 달 살기와 같은 여행 트렌드도 많이 생겨나고 있어 예전과는 좀 달라지긴 했지만, 어쨌든 메뚜기 점프하듯이 바쁘게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여행은 내가 방문한 곳의 단편만을 보고 떠나는 것이라 생각해서 딱히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몇 년 전 짧았던 헬싱키와의 만남이 많이 아쉬웠던 측면도 있고.

단지 만 하루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이 세상 둘도 없는 이상향으로 각인되어 있던 헬싱키. 그래서 결국 이렇게 나를 다시 돌아오게 했던 헬싱키. 지난번과는 달리 나름 긴 시간을 보내고 떠나는 지금...


이제 헬싱키는 내 마음속 이상적인 도시에서 지워졌다.




이래서 사람도 도시도 오래 겪어봐야 하는 것일까. 분명 예전에 봤던 헬싱키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어찌 보면 지루해 보일 정도의 표정으로 오가는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 보였고 무언가에 대한 갈증이나 욕심이 없어 보였다. 한 나라의 수도라기엔 너무나도 조용해 보이는 이곳은 진정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는 곳 같았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 헬싱키는 달라 보였다. 여기도 분명 그 이면에 다른 모습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중심가에서 좀 떨어진 변두리의 숙소를 오가며 본 도시의 모습은 이전의 그것과는 달랐다. 아름답고 밝은 줄로만 알았던 도시는 그 이면에 어둡고 음습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고, 뒷골목에는 삶에 찌든 지친 표정의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도시의 중심과 달리 변두리 삶의 모습은 달랐다. 여느 도시와 같이 빈부격차가 존재해 보였고, 유럽을 휘감고 있는 난민 문제는 이곳까지 퍼져 있는 듯했다. 에스플라나디 거리와 공원에서 마주치는 여유로운 표정의 백인들과 즐거운 관광객의 모습은 그곳을 벗어난 거리에선 일상에 지친 소시민의 모습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작은 범죄 하나 일어나지 않을 것 같던 이 도시에도 낯선 이방인이 혼자 걷기에 부담스러워 보이는 뒷골목이 분명 존재했다. 소박한 삶에 만족하며 편안하게만 지낼 것 같던 사람들은 온데간데없고, 빼앗긴 자의 그늘진 얼굴들이 가득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헬싱키는 이전에 내가 가본 도시들과 비교했을 때 분명 행복한 모습의 도시에 속하는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5년 전 내가 보았던 것은 이 도시가 지니고 있는 여러 모습 중 잘 가꾸어진 대문 앞 정원과 같은 것일 뿐이었다. 일주일이 채 안 되는 시간을 지낸 내가 뭐라 속단하긴 힘들겠지만, 유토피아라 불릴 만큼 선하고 고결한 모습만을 간직한 곳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그래서일까, 헬싱키를 떠나는 지금의 마음이 그리 가볍지만은 않다.

언젠가 꼭 한번 살아보고 싶던 이상향을 잃어버린 상실감이 너무 크게 느껴진다.

오래된 사진 속 아련한 첫사랑과의 아름다웠던 추억이 사실은 잘못된 기억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버린 것처럼...






[D+29] 2018.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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