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way ticket project #12 스톡홀름
스칸센을 꼼꼼히 둘러보지 못했던 것은 비단 그곳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넓은 이유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순전히 다음 일정에 대한 의무감 때문이었다.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왜인지 그 실패를 두 눈으로 확인해야만 할 것 같은 의무감. 살다 보면 가끔은 이룰 수 없는 바람이란 걸 이미 알면서도 꼭 확인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다. 우리나라의 러시아 월드컵 마지막 경기는 그래서 꼭 봐야만 했다.
헬싱키의 숙소에서 함께 했던 일행과 나는 스톡홀름에서 독일전 경기를 같이 보기로 약속했다. 그래서 하루 먼저 이곳에 도착한 나는 어제도 그제도 다니는 내내 경기를 볼 수 있는 마땅한 펍(Pub)을 찾아보고 있었더랬다. 하지만 그러다 어제저녁 문득 든 생각...
'잠깐만...!! 예선 마지막 경기는 같은 조의 모든 팀들이 동시에 경기를 치르는 게 일반적이고... 그럼 우리가 독일과 경기를 하는 같은 시간에 분명 멕시코와 스웨덴 경기가 있을 테고... 여긴 스웨덴이니까... 당연히 스웨덴 방송은 자신들의 경기를 중계하겠지... 앗!! 이런 젠장!! '
그랬다. 별 어려움 없이 어디선가 경기를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애초에 잘못된 것이었다. 월드컵이 아무리 전 세계인의 관심사라고는 하지만 자신들의 경기를 제쳐두고 남의 나라 경기를 보여줄 펍은 없을 테니 말이다. 예상치 못한 어이없는 상황에 당혹스럽기도 했고 웃음도 나왔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일단 포기하지 말고 부딪쳐 보기로 했다. 어디선가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스칸센을 나와 페리를 타고 감라스탄이 있는 반대편 섬으로 건너온 우리는 커다란 TV가 걸려있는 선착장 바로 앞 펍으로 일단 직진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지만 TV에선 스웨덴-멕시코 전 경기 중계가 준비되고 있었고, 펍은 이미 바이킹 민족의 노란 유니폼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역시 우리의 마지막 경기를 보는 일은 요원해 보였다. 하는 수 없이 경기 중간 우리나라 경기 상황이라도 언급해주길 바라보는 수밖에.
경기가 막 시작되려는 즈음 뒤늦게 가게 안으로 들어온 한 친구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우리 자리에 합석할 수 있겠는지 물어본다. 뭐 굳이 안될 이유는 없다. 어차피 TV에 나오는 저 축구경기 앞에선 우리는 제삼자이자 방관자일 뿐이니까. 고마워, 아니야 괜찮아 식의 의례적인 인사치레 후 우리가 한국 사람이란 걸 알게 된 그는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핸드폰을 꺼내 만지작거리더니 갑자기 우리 앞에 내밀었다.
"이걸로 너희 나라 경기를 볼 수 있을 거야. 화면이 좀 작아 잘 안 보일 순 있겠지만 말야."
우리의 애로사항(?)을 금방 눈치챈 그가 다른 채널에서 중계하는 우리나라 경기를 찾아준 것이었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작은 화면으로나마 드디어 우리도 경기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눈앞의 커다란 TV 대신 조그마한 핸드폰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하지만 한참 경기를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쳐간다. 내 앞의 이 친구가 보여준 호의는 너무너무 감사하지만 결국 우리는 당연히 우리의 승리를 바라고 있고, 그렇게 되면 열렬히 응원 중인 이 친구의 팀은 16강에 탈락하게 될 거란 사실. 스웨덴에 있는, 스웨덴 경기를 보여주는 술집에 앉아, 친절한 스웨덴 친구가 배려해준 핸드폰으로 감사히 경기를 얻어 보고 있지만, 결국 우리는 내심 그들의 바람이 실패하기를 바라고 있다는... 오묘한 상황의 아이러니를 말이다.
스웨덴의 성공, 우리의 실패로 경기가 마무리된 후 이 고마운 친구는 연거푸 우리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 본인들만 16강에 올라가고 우리는 탈락하게 돼서 안타깝고 미안하다며. 그러곤 근처에 있던 친구를 불러 우리가 이동할 다음 장소까지 직접 차를 태워주기까지 했다. 우리의 기운을 북돋아 주려는 듯 '강남스타일'을 차 안에 크게 틀어주면서 말이다.
인간이 자신의 이익을 우선으로 함은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그 행동이 나를 도와주고 나에게 호의를 베풀어주는 누군가의 그것과 배치되는 일이 되었을 때 과연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능에 따라 여전히 나의 이익을 우선에 두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나의 그것을 과감히 포기하고 상대방을 위해 양보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 것일까? 둘 중 어떤 선택이 더 바람직한 것일까?
우리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핸드폰을 기꺼이 내어 준 스웨덴 친구의 기쁨을 배신해야 했고, 그 친구는 자신들의 자리를 기꺼이 내어준 우리의 행복을 배신해야 했다. 어쩌면 서로 내심 각자의 바람이 이루어지길 바랐지만 상대방을 응원하는 위선을 보여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위선의 마음을 가슴 한편에 숨겨둔 내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게 맞는 일일까? 아니면 나를 위해 양보해준 상대의 이익보다 나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게 더 자연스러운 것일까?
어쩌면 경기가 끝난 후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던 그는 이런 복잡한 감정의 부끄러움을 보상받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우리는 경기를 보는 내내 마음 쓰였던 부끄러움을 우리 팀의 실패로 인해 보상받았다고 생각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연히 맞닥뜨린 작고 재미난 에피소드이지만 그 에피소드 속에서 오묘한 삶의 아이러니마저 생각하게 해주는 것이 여행이다. 그렇게 여행 이후 간직하게 될 소중한 추억을 또 하나 만들어간다.
[D+32] 2018.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