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정한 세상 Jan 13. 2024

인간, 기계, 인류에 대한 단상

      영화 애드 아스트라(별을 향하여)를 보고

한 달 전쯤, 우연히 어디선가 괜찮은 영화라는 얘기를 듣고 언젠가 한 번 봐야지 생각했던 공상 과학 영화 <애드 아스트라>를 넷플렉스에서 찾아, 드디어 보았다. 이 영화는 브래드 피트가 우주 비행사가 되어 20년 전에 우주로 떠난 아버지를 찾아 나서는 이야기이다. 그의 아버지 클리포드 맥브라이드는 미지의 지적생명체를 찾기 위한 <리마 프로젝트>의 책임자였다. 그가 해왕성까지 도달한 뒤 지구에서는 이상한 에너지 폭풍surge으로 인한 재앙들이 생긴다. 그 재앙의 근원이 맥브라이드 박사라고 의심하는 지구의 프로젝트 책임자들은 로이가 아버지를 설득시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그를 아버지를 찾는 우주선의 책임자로 선정한다. 단 로이는 임무를 계속 수행하기 위해서 매일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다는 정신심리분석을 통과해야 한다.


청소년기에 떠나간 뒤 소식이 끊긴 아버지는 그리움의 대상이지만 한편 자신과 어머니에게 끝내 돌아오지 않는, 로이가 성인이 된 후에도 풀어야 하는 삶의 매듭이며 미스터리로 작동한다.

모든 우주 비행사에게 영웅이었던 아버지는 아들에게는 잡히지 않는 존재이다. 사춘기에 떠난 후 돌아오지 않고 소식도 끊긴 아버지. 무엇이 그를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가 알고 싶은 아들.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그의 존재를 느끼고 싶은 아들은 아버지를 따라 우주 비행사의 길을 선택한다.

마음과 시선이 항상 아버지가 떠난 미지의 세계로 향해 있는 아들은 사랑하는 여인이 있지만 두 사람 사이는 무엇인가 가로막힌 것처럼 서로 소외되어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조차 자신의 불안과 두려움을 솔직히 드러내고 도움을 청하지 못하는 아들은 겉으로는 대단히 안정되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유능한 사람으로 비친다. 어떤 위급한 상황에서도 맥박이 80을 넘은 적이 없는 침착하고 이성적인 사람으로 나온다.

그러나 그는 임무 수행 중에도 항상 마음속으로 <나는 왜 여기에 와 있는가> <나는 왜 그녀를 잡지 못했는가> <나는 왜 이 일을 하고 있는가> 등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의 이런 실존적 불안과 회의는 아버지에 대한 애정과 배신감 혹은 의혹이 뒤섞인 채 해소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풀리지 않는 아버지와의 관계는 아들의 다른 인간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그는 아무와도-사랑하는 연인과도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는 외롭고 겉도는 사람으로 살아간다.




영화는 달을 거쳐 화성을 지나 태양계의 끝 해왕성까지 긴 여행을 담는다.

긴 여행의 과정에 우주 강도를 만나기도 하고 생물학적 실험에 의해 탄생된 괴물을 만나 목숨을 건 싸움도 한다. 사실 이런 장면은 감독이 말하고 싶은 주제와는 별 상관없는 곁다리 이야기이다. 주제에 대한 집중도를 오히려 떨어뜨리는, 할리우드식 재미를 주기 위한 장면인 것 같다. 그러한 액션보다 우주의 광대함과 그 앞에서 로이가 느끼는 막연한 기대와 외로움, 희망과 절망 같은 감정을 더 담았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반면에 로이가 에너지 폭풍으로 고장 난 우주 정거장을 고치기 위해 우주공간을 배경으로 벌이는 사투는 인간의 삶의 공간이 우주로까지 확장된 현대시대에 인간의 존재론적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던져주는데 나름의 역할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과학적 고증을 거의 하지 않은, SF영화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영화이다. 이 영화는 인간의 존재론적 질문을 위한 철학적 영화이며 그 배경으로 우주를 선택했을 뿐이라는 점을 이해하고 봐야할 것 같다.


어쨌든 20년의 세월과 태양계의 광대한 공간을 지나 드디어 아들은 아버지를 만난다.

로이는 우주선 안에서 아버지 맥브라이드가 긴 우주여행을 하면서 우주에 대해 수십 년 동안 축적한 자료를 본다. 그것은 ‘참으로 놀랍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에 미지의 생명체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이 말은 우주에는 미지의 생명체가 없다는 과학적 사실을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저 밖에는 내가 찾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그의 실존적 깨달음을 표현한다. 임무는 실패했다. 아버지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어떤 사람인가?

미지의 지적생명체를 찾는다는 자신의 임무의 실패, 혹은 자신의 인생의 실패를 끝까지 인정할 수 없었던 아버지 클리포드 맥브라이드는 자신을 집으로 데려가려는 아들 로이의 손을 끝내 뿌리치고 우주 공간으로 날아간다.

길고 험한 항해의 끝에 마침내 만난 아버지는 기어이 로이의 간절한 청을 뿌리친다. 로이는 ‘무엇 때문에 아버지는 포기할 수 없는가?’를 묻는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일 수도 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이 일을 하는가?’  '나의 존재 바깥에는 아무 것도 없다.'


클리포드 맥브라이드는 너무나 길고 외로운 항해에 지친 나머지 집으로 돌아가길 원하는 승무원들과 전투를 치르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목적을 포기하지 않는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감독은 로이의 관점에서 클리포드를 바라보기 때문에 그에게 자기변명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 단순히 영웅심에 사로잡힌 미치광이였을까?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과학자의 집념 때문이었을까? 우주라는 환상적 비현실적 공간을 떠나서 현실 세계에서는 존재의 뿌리를 내리고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태생적 방랑자였을까?


어느 쪽이었든 인류의 역사를 보면 이런 미치광이 같은 천재, 혹은 호기심 가득하고 집념에 찬 방랑자들이 인류 문화의 큰 부분을 구성해 온 게 사실이다.

감독은 로이의 입을 통해 이제 삶의 의미를 먼 곳에서 찾지 말고 내 옆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나의 옆, 내가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 관계를 맺은 사람들과 서로 짐을 나누고 사랑하면 삶은 살만한 것이라는 깨달음을 주고 싶어 한다. 어떤 철학자는 직장에서 좀 더 많은 연봉을 받기 위해 애쓰는 대신 좋은 영화나 연극을 보고, 음악과 미술을 감상하는데 자신의 시간과 마음을 쏟는 것, 어느 것이 더 행복한 삶이고 본인에게 가치 있는 삶일까 묻는다.

그래, 삶은 그런 거야. 뭐 대단히 굉장한 것을 성취하려고 할 필요가 없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하고 의미 있는 관계를 맺고 거기에 의지하며 살아 가면 되는 것이지.


그 깨달음에 위안받고 마음이 한없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마음 한 구석 해소되지 않는 불안과 의문이 있다. 세상에는 더 높은 곳, 더 넓은 곳, 더 깊은 곳을 탐색하고 더 많은 것, 더 비싼 것, 더 황홀한 것을 가지려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제2기술혁명의 시기라는 지금, 그리고 앞으로의 시간은 나의 운명이 단지 나의 존재론적 결단만으로 규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이 점점 더 인류의 일상생활과 깊이 연결되고 좌우하게 될 세상에서 위험은 어쩌면 나의 실존적 고뇌보다 깊고, 결정적으로, 외부로부터 온다.


인류의 진화를 기술적 발전과 연결시키려고 하는 집념을 가지고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또 그것을 뒷받침하는 정책과 제도를 운영하는 사람들, 그들을 움직이는 내적 동기를 우리는 제대로 파악하고 잘 방향 잡게 할 수 있을까? 소소한 일상의 삶에서 살아가는 의미와 행복을 추구하는 대다수의 우리는 지금 우리가 누리는 기술 발전의 혜택을 부인할 수 없고 거부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면 우리 속에 존재하는 또 다른 클리포드 맥브라이드가 그 욕망과 집념으로 우리를 위험에 빠뜨리는 결정을 내릴 때 우리는 그것을 제 때 인식하고 저지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추구한 철학자가 있다.

<인공지능의 시대, 인생의 의미>라는 책을 쓴 독일의 철학자이며 방송인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라는 사람이다. 그의 열정적이고 도전적인(특히 컴퓨터 과학자글에게) 책을 다음에 소개하려 한다.


작가의 이전글 탈 진실의 시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