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에서 영성을 느끼다
[표지 그림은 기원 전 7000년 경 최초의 인류의 도시형 집단 거주지를 상상한 그림. 남부 아나톨리 지역에서 발견 됨. 도로와 현관이 없어서 지붕을 넘어 다니며 출입했다고 함.]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으로 유명한 리처드 도킨스는 과학과 인간의 영혼이 맺는 관계에 대해 여러 개의 글을 썼다. 진화론과 자연선택이론, 종교론, 철학과 사회정치적 문제에 대해 그가 한 강연이나 에세이 등이 <Science in the soul>이라는 책으로 묶여 있다.
그는 잘 알려진 대로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존재를 전제하는 종교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또한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분리시켜 생각하는 데카르트식 이원론에도 비판적이다. 진실을 찾기 위한 끝없는 탐구와 증거에 기반한 이론을 중요시하는 과학자이지만 과학이 인간의 영혼에 미치는 영향력에 있어서 과학은 예술과 같은 반열에 있다고 주장한다. 과학을 통해 밝혀진 우주의 생성, 생명의 역사, 진화의 과정을 알게 되면 우리는 예술을 대할 때 느끼는 것만큼 자연에 대한 경외감과 영혼의 고양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먼 옛날 우리의 조상은 밤하늘을 우러러보며 수많은 별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태양과 달은 누가 만들었는지, 우리의 삶의 터전과 주변의 모든 생물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궁금해하면서 그 하나하나의 생명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모든 것 속에 미지의 힘-신적 존재가 있다고 느꼈다.
종교의 그 자리에 과학이 자리 잡은 것은 아주 짧은 역사에 불과하다. 그러나 과학이 인류의 현재와 미래에 미칠 영향은 과거의 그 어떤 종교의 영향력 보다 거대하다. 이 거대한 힘을 가진 과학을 단지 가치중립적인 것, 실용적인 것으로만 보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과학에 대한 태도였다.
도킨스는 과학은 실용적인 것이지만 또한 ‘가치’를 가진 것이며 ‘영혼’을 품고 고양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리처드 도킨스는 그랜드 캐년의 남쪽 둘레길을 걷다가 어느 낮은 담벼락에 누워 밤하늘의 은하수를 올려다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나는 지금 시간적으로 수십만 년의 과거를 목격하고 있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저 빛은 수십만 년 전 출발했던 빛이 긴 여행 끝에 이제 나의 눈동자를 통과해 망막에 부딪힌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찍 다시 같은 자리에 가서 전날 밤 자신이 어둠 속에 누워있던 자리에서 캐년의 바닥을 내려다본다. 그는 그 낭떠러지 깊이에 몸을 떨며 역시 2억 년 전 오직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만이 은하계 아래에서 꿈틀거리고 있었을 과거의 시간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에게 과학은 자연의 신비한 비밀을 벗겨내는 수단이지만 또한 자연의 드러난 진실에 몸을 떨게 만드는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 과학이 드러낸 자연과 생명과 우주의 비밀은 너무나 신비롭고 거대하고 경이로워서 종교적이기까지 하다. 그는 만약 자신이 종교를 가진다면 이 신비한 대자연을 신성한 곳으로 여기고 경외했던 호피족의 종교와 가장 가까웠을 거라고 말한다.
캐년의 단층들이 쌓여 올라오는 긴 진화의 과정에서 언제 ‘영혼’이라는 것이 존재하게 되었을까? ‘영혼’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무엇인가가 마치 전등 불의 스위치를 켠 것처럼 갑자기 등장했을까? 아니면 ‘영혼’은 수염벌레 속에서 영혼의 1/1000 정도가 고동치다가 고대 옆지느러미 물고기 속에서 1/10쯤, 안경원숭이 속에서는 1/2쯤 뛰고 있다가 드디어 전형적인 인간의 영혼이 되고 드디어 베토벤이나 만델라의 수준에 이르게 되었을까?
인간의 영혼은 두뇌와 떨어져 생각할 수 없다. 인간의 영혼/정신/지능은 두뇌 속에 존재한다. 두뇌는 우리 몸을 이루는 여러 물질과 똑같은 물질로 만들어져 있다. 따라서 두뇌라는 몸을 떠나면 영혼도 존재할 수 없다.
진화의 과정에서 보면 ‘지능’은 다양한 수준이 있다.
지능에 관계하는 유전자는 진화의 역사 속에서 분명한 분기점이 있었다. 만약 6백만 년 전 우리와 침팬지의 공통 조상이었던 원숭이 보다 우리가 우수한 지능을 가졌다면 우리의 조상에게 지능이 발전하는 진화적 출현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뇌의 물컹한 특징 상 뇌의 진화를 화석을 통해 직접 관찰할 수는 없다. 그러나 두뇌의 크기가 증가하는 경향성은 분명히 존재했다. 이는 척추동물의 화석 기록에서 볼 수 있는 매우 드라마틱한 진화적 출현의 하나이다. 진화적 출현은 관련된 대상들 사이에 유전자적 다양성(여기에서는 두뇌의 크기와 아마도 지능)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의 조상들 사이에는 지능의 다양성이 존재했다. 지금이라고 그 다양성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이상한 일일 것이다. (우생학적으로 더 높은 지능을 가진 인간을 만들기 위한 인위적 수정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여러 입장에 대해 도킨스는 진화론의 과학적 진실과 선택의 윤리적 판단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비판한다.)
그러면 ‘두뇌’는 언제 누구에게서 처음 나타났는가?
6억 년 전 최초로 지구행성에 새로운 무엇인가가 태어났다. 환경을 지각하고 그에 반응할 수 있는 통제센터-두뇌가 나타났다. 고대 편충platworm/planaria 안에서 처음 발생했다. 최초의 동물 사냥꾼이다. 이 두뇌는 사냥꾼이 공격할 대상을 찾고 전술을 짜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다. 이 편충의 두뇌는 두 개의 밀도 높은 신경다발과 거기에서 뻗어 나온 8천 개의 신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것과 같은 화학물질을 갖고 있었다. 신경전달물질neurotransmitters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편충은 학습할 수 있었고 환경에 대한 정보를 처리하고 그에 맞게 행동할 수 있었다. 그리고 최초의 탐험가였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찾아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러 나선 최초의 생명체였다.
그로부터 6억 년이 지나 우리는 우주에 비견할 만한 두뇌를 갖게 되었다. 만약 인간의 두뇌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 그리고 그것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숨 쉬는 일, 꽃 향기를 맡고 어떤 꽃인지를 구별하는 일 등을 포함해서 알고 있는 모든 지식,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언어로 기술한다면 40억 권의 책이 넘는 분량의 지식을 머릿속에 넣고 다니는 셈이라고 한다.
칼 세이건이 <코스모스>에서 기술한 것처럼 “두뇌는 아주 작은 장소 안에 있는 아주 큰 곳”이다. 우리는 각자 천억 개의 뉴런을 가지고 있다. 이 숫자는 은하계의 별들의 숫자에 비견된다. 각각의 뉴런은 다른 부품들과 연결되어 두뇌 속의 네트워크를 만든다. 많은 뉴런이 수천 개의 연결망을 통해 이웃들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의 ‘의식’은 이 두뇌 속의 수 백조 개의 뉴런의 연결망이 완전히 꽃피었을 때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나’이고 ‘너’이다.
칼 세이건의 인생의 동반자이며 <코스모스> 프로젝트를 함께 했던 앤 드루얀은 인간의 두뇌에 대해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가 느끼는 가장 깊은 사랑의 감정, 혹은 자연의 거대함을 살짝 엿보았을 때 느끼는 경이로움, 그리고 인간 의식의 복잡하고 섬세한 구조들이 이 연결망에 의해 가능 해졌다. 이것이 진화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출현emergence’이다. 아주 작은 물질이 함께 작동하여 자신들보다 훨씬 더 큰 무엇인가가 되고 우주에게 스스로를 알린 존재가 출현한 것이다. 인간의 두뇌 속에는 수 천조 개의 커넥션이 존재한다. 이는 우리가 볼 수 있는 모든 갤럭시보다 100배나 많은 커넥션이 우리의 머릿속에 담겨있다는 것을 뜻한다. 머릿속의 이 연결망을 지도화하는 작업이 이제 시작되었다. 이 지도를 각자의 커넥톰connectome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미래 어느 날 우주선에 이 커넥톰 중 하나를 실어 보내고 누군가가 그 정보를 받아볼 것이라 희망할 수 있을까?
진화의 과정을 통해 인간의 두뇌가 우주를 담게 되었다는 것을 발견한 과학자들의 ‘과학적 영성’은 인간의 위대함이나 과학의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는 오만함이 아니라 겸손함으로 방향을 잡는다. 과학은 끊임없는 연구와 실험에 의해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사실들에 기반하여 주장하고, 언제든지 다른 증거에 의해 수정될 수 있는 것이며, 수정되는 그 순간까지만 진실인 열린 결말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종교적 진리와는 다르게 겸손하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과학이 알게 해 준 우주의 광대함, 우주와 생명이 생성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긴 시간, 진화의 역사와 인간 두뇌의 경이로운 발견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경외와 겸손함의 감정일 것이다.
카시니 우주선이 토성의 띠에서 보내온 지구의 사진
칼 세이건은 보이저호에서 최초로 보낸 지구의 모습을 <창백한 푸른 점>이라고 표현했다.
저 점을 다시 보자. 저것이 이곳, 우리의 집이다. 지구는 광대한 우주라는 운동장에 있는 매우 작은 무대이다. 이 작은 점의 한 조각을 지배하려고 수많은 장군들과 황제들, 그들의 영광과 승리를 위해 흘러넘친 피의 강물을 생각해 본다. 한 뙈기 땅의 저 쪽 구석에 살던 이들이 자신들과 거의 다를 것 없는 이 쪽 구석에 사는 사람들을 찾아와 행한 그 모든 잔인함을 떠올려 본다. 얼마나 잦은 오해가 있었는지, 얼마나 적극적으로 서로를 향해 칼을 휘둘렀는지, 그들의 증오는 얼마나 뜨거웠는지.
젠 채 하는, 스스로가 중요하다는 상상, 우리는 우주에서 뭔가 특권을 가진 존재라고 생각하는 환상, 이 모든 것들이 저 창백한 빛에 의해 도전받고 있다. 우리의 행성은 거대한 우주의 어두움으로 감싸인 외로운 작은 얼룩이다. 이 희미함 속에서, 이 광대함 속에서, 우리를 도울 수 있는 힘이 밖에서 오리라는 어떤 힌트도 없다.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 밖에 없다.
과학자들이 갖는 종교적 감수성은 몸에서 분리된 정신의 위대함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다. 또는 대부분의 종교에서 말하는 초현실적인 존재를 느끼는 것이 아니다.
칼 세이건이 우주를 바라보며, 우주의 생성과 현재까지의 운행의 비밀들을 발견하며 그 불가능할 정도의 규모와 법칙에 경외심을 느끼고 그 아름다움에 감탄했던 것, 그러한 과학적 감수성이 인간의 영혼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다.
인도계 우주물리학자 수브라흐마니안 챤드라세카하르가 말한 것처럼 ”우주의 아름다움 앞에서 전율하는 것” 혹은 아인시타인이 말한 것처럼 “만약 내 안에 뭔가 종교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과학이 드러낼 수 있는 세계의 구조에 대한 무한한 경외심이다.” “나는 매우 깊게 종교적인 비신자이다.” 도킨슨은 스스로를 이 “깊이 종교적인 비신도 deeply religious nonbeliever 라는 의미에서 ‘영적인 사람’이라고 고백한다. 그는 과학은 멋진 것이며 동시에 필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영혼을 위해 멋진 것 – 먼 우주 공간과 먼 시간을 사색한다는 의미에서. 또한 사회와 우리 자신의 웰빙, 우리의 짧고 긴 미래를 위해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도킨스는 과학은 칼 세이건이 그런 것처럼 비전과 시적인 측면,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학은 단지 과학적 ‘사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사고의 방식’을 의미한다. 그 속에서 인간의 영성이 꽃 피어난다. 도킨스에 의하면 이러한 새로운 차원의 출현-인간의 영혼이 바로 두뇌의 진화에 의해 시작되었고 이제 오래된 법전(DNA)을 거스르고 ‘현재의 이익’을 따르는 이기적 유전자 대신 ‘미래’라는 새로운 개념이 선택지로 눈앞에 있다.(다음 글에서 리처드 도킨스의 이러한 두뇌의 새로운 선택 즉 이기적 유전자와 자연선택에 대한 인간두뇌의 반항에 대해서 소개하려고 한다)
세상의 어지러움으로부터 마음을 다독이고 싶을 때 깊은 영혼의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과학책을 읽는 것은 참 효과적인 치유 방법이다. 세상의 비밀을 여전히 비밀로 남겨두거나 나에게만 드러난 진실로 받아들이거나 이해할 수는 없지만 초월적 힘에 의지해 믿어야 하는 종교적 조언들과 달리 현실에서 눈감고 도망갈 위험이 없기 때문이다. 나와 인간의 깊이, 세상의 넓이를 새삼 마음에 새기고 겸손해지기 때문이다.
일 년 만에 다시 온 버나비 딸네 집 창밖으로 고층 건물의 불빛이 화려하다. 안타깝게도 이 도시의 밤하늘에서 별을 세며 우주를 생각하는 기회를 갖기는 어렵다. 그래도 저녁 9시 창 밖 고층 건물 사이 걸려있는 노을이 아름다워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