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리버
동생과 함께 이른 저녁을 먹고 가까운 강가로 산책을 나섰다.
잠깐 운전해서 주차장에 차를 세운 후 공원 산책로에 들어섰다. 아직 햇볕이 뜨겁고 눈이 부시다.
해지는 모습을 보려면 2시간쯤 늦게 나와야 했다. 키 큰 나무들이 군데군데 서 있고 길가에 무성한 풀들 사이로 갖가지 색깔의 들꽃들이 머리를 내밀고 있다.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 위에 나비가 되기 전 애벌레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어쩌다 여기까지 기어 나왔나… 밟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발길을 옮긴다.
야생 칠면조 무리가 숲에서 기웃거린다.
숲 사이 길을 1.7km 정도 걸으니 강이 보인다. 강을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가 있다. 우리는 다리 아래 강변으로 내려섰다.
가벼운 그늘막을 치고 휴식을 즐기는 가족이 눈에 띈다.
강은 잔잔한 물결에 부딪친 햇빛을 은빛 비늘처럼 반사하고 있다. 자갈로 덮인 강변을 조금 걸었다. 자갈들 사이로 노란 꽃을 단 긴 꽃대가 여기저기 눈에 띈다. 동생이 그들을 가리키며 야생 열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잎과 꽃이 열무를 닮았다. 어린 열무를 뜯어다가 나물을 해 먹어 보았는데 먹을 만했다고 동생이 말한다. 직장에서 어떤 이가 채취한 열무와 고사리를 줘서 알게 되었다는 얘기도 한다. 먹을 만한 것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기 힘든 채집과 수집 본능이 유난히 한국과 중국의 어머니들 피 속에 강하게 남아있는 것 같다. 오랫동안 가난과 배고픔의 고통에서 자식들을 키워야 했던 기억이 남아있기 때문일까. 하도 많이 고사리를 채취해 가는 바람에 북미 지역에서는 버섯이나 고사리 채취가 감시 대상이 되어 발각되면 큰 벌금을 물어야 하게 되었다.
동생은 이 강가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앉아 세월을 낚아볼까 생각 중이라고 했다.
자식들이 각자 자신들의 삶을 찾아 떠나고 직장에서도 은퇴하고 나니 남는 시간이 문제다. 낚시를 하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실행은 쉽지가 않다. 나와 다르게 마음먹으면 바로 실천에 옮기는 동생이지만 낚시에 대해 아무 사전 지식이 없는 터라 누군가 길잡이가 있어야 했다. 가까운 곳에서 낚시 강습을 한다는 광고를 보고 얼씨구나, 친구 한 명을 꼬여서 함께 등록을 했다고 한다. 고대하던 강습 첫날 그곳을 찾아갔더니 낚시도구를 판매하는 가게였다. 문제는 수강생이 너무 적었는지 이유도 분명히 밝히지 않고 강습회가 미뤄졌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한국이라면 상업용 낚시터나 낚시도구 판매하는 곳에서 친절한 가르침을 쉽게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아직도 동생은 낚싯대를 잡아보지 못하고 있다.
동생이 왜 낚시에 꽂혔는지 모르겠다. 뜨거운 햇볕 아래 낚싯줄을 드리우고 하염없이 무한 속으로 침잠하고 싶은 것일까. 번뇌를 잊고자 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40세가 넘어서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상처투성이 과거의 삶과 완전히 단절된 새 삶을 일구고자 찾아온 낯선 나라였다. 온전히 혼자 힘으로 직장과 집안 일과 육아와 모든 일상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던 생활을 동생은 참으로 용감하고 씩씩하게 살아냈다.
원래 올해 말쯤 은퇴할 계획이었던 동생은 3월에 어머니가 입원하시자 병간호를 위해 직장에 휴가를 신청하고 한국으로 날아갔다. 어머니 퇴원 후 직장에 돌아갔지만 내가 수술을 앞두고 있어서 또 휴가를 내기 눈치 보인다고 아예 조기 은퇴를 했다. 자기가 사는 동안 워낙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아서 죽기 전에 여행이라도 마음껏 하려면 더 늙기 전에 일을 그만둬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는 변명을 덧붙이고.
인생에 풀어야 할 어려운 문제도 이젠 별로 없고 자신의 삶에 지극히 만족하고 그것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낚시는 아마도 동생이 자연을 즐기는 한 방식일 것이다. 강과 바람과 햇볕에 온전히 자신을 내맡긴 채 시간도 잊고 무념무상의 경지에 잠기고 싶은 것이 아닐까. 그저 현재의 그 시간이 영원에 가 닿는 순간을 즐기고 싶은 것일까. 그저 아무 목적도 없고 생각도 할 필요도 없고 바삐 움직일 필요도 없는 낚시가 동생에게 꼭 맞는 휴식일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