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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레센도 Jun 29. 2023

외과의사의 미술사

그림으로 보는 직업

사람마다 각자 로망으로 삼는 직업이 있을 것이다. 내 경우는 외과의사이다. 의학 드라마 <하얀 거탑>에서 주인공인 외과 의사 장준혁이 수술 장갑을 낀 두 손을 들고, 찬란한 빛을 받으며 수술실로 들어서는 장면은 멋진 의사의 이미지로 뇌 속에 각인 되어 있다. 그 수많은 의학 드라마들의 주인공이 거의 다 '외과' 의사인 걸 보면, 외과의사에 대해 이상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닌 듯하다. 서양 미술사에도 오래전부터 이 외과의사들이 등장하는 작품들이 있었는데, 그 주요 작품들을 살펴보면서 의사라는 직업의 시대적 변화를 이해할 수 있다. 






검은 다리의 기적

작가 미상, 성 코스마스와 성 다미안의 다리 이식, 16세기 경, 캔버스에 유채, 119 x77 cm, Landesmuseum Württemberg

머리에 황금빛 후광을 가지고 있는 두 남자가 천사들의 시중을 받으며, 다리 수술을 하고 있다. 그들은 누워 있는 남자의 다리를 잘라 내어 바닥에 내려 놓고, 대신 검은 색 다리를 가져와 붙여 주고 있다. 수술을 받는 남자는 고통을 느끼기는 커녕, 편안히 잠에 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우메 우게트, 무어인의 다리를 이식하는 성인들, 1459-1460, 패널에 템페라, 산타 마리아 교회, 테라사

남자의 다리를 수술 중인 두 사람은 쌍둥이 형제 성 코스마스와 성 다미안 (Saints Cosmas and Damian, ?~287)이다. 이 그림은 중세의 대표적인 기독교 성인 전설집 <황금전설>에 나오는 "검은 다리의 기적"이라는 이 쌍둥이 성인과 관련된 유명한 일화를 보여준다. 암으로 다리가 썩어가는 한 노인이 로마의 성당에서 잠이 들었는데, 꿈에 성 코스마스와 성 다미안이 나타나, 썩은 다리를 잘라내고, 죽은지 얼마 안되는 무어인의 다리를 붙여주었다는 것이다. 잠에서 깨어난 이 노인은 아무런 문제없이 멀쩡하게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마테오 디 파치노, 성 코스마스와 성 다미언, 1370-75, 패널에 템페라와 금, 135.6x97.4cm, 노스캐롤라이나 미술관 

오늘 날의 의사, 특히 외과의사를 연상시키는 이 성인들은 3세기경 지금의 터키와 시리아 사이의 아랍 지역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은 보상을 바라지 않고, 가난하고 아픈 환자들을 무료로 치료해 주었는데, 특히 수술에 능해서, 수 많은 기적적인 치유의 결과를 만들어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233~311) 황제시대,  끝까지 기독교 신앙을 포기 않아서 결국 참수를 당했다. 

프라안젤리코, 성 코스마스와 다미안의 순교, 1438- 1440, 36 x46 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 수도사이자 화가였던 프라 안젤리코가 그린 제단화의 일부이다. 이 제단화는 메디치 가문의 후원으로, 피렌체 산 마르코 성당을 위해 제작되었다. 메디치가의 수호성인이 바로 성 코스마스와 다미안이다.  


이들은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이끈 메디치(Medici) 가문 수호성인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메디치(Medici)라는 이름 자체가 의사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세 이후 이 두 성인의 인기는 아주 높아서,  이발사-외과의, 약제사, 미용사, 붕대 제조인, 일용 잡화상 같은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업무와 관련된 다양한 개인이나 집단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성 코스마스와 성 다미안에 대한 전설은 당연히 두 성인의 신앙적 가치를 높이기 위한 상상력의 산물이다. 하지만, 외과 수술은 커녕, 인체 해부학에 대한 인식조차 전무 하던 중세시대에, 인간의 몸을 해체하고 조립해서 병을 고친다는 상상력과 종교적인 이야기가 맞물려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또한 어떠한 물질적 대가 없이 오직 환자 치료를 위해 헌신했다는 두 성인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가장 이상적인 의사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다.





이발사-외과의

Jan Josef, 사혈 치료를 하는 사람, 17세기 후반 경, 캔버스에 유채, 64.5 x 85 cm, The Wellcome Trust

하지만 중세이후 수백년 동안, 현실에서의 외과의사는 보통 이발사들이 겸업하는 천대받는 직종이었다고 한다. 직접 손을 써서, 피와 체액, 더럽고 흉측한 상처들을 다루어야 하기 떼문에 외과술은 천박하다는 인식이 강했던 것이다. 이발사들은 그 당시 흔히 하는 종기짜기라던가, 이뽑기, 가벼운 열상의 치료, 사혈 같은 비교적 단순한 의료적 행위들을 경험적으로 습득하고 이를 통해 일반인들을 치료했다. 

헤라르트 도우, 이뽑는 사람, 1630년대, 패널에 유채, 루브르 박물관, 파리

따라서 '이발사-외과의사'는 제빵사나 양조업자처럼 신분인 낮은 계층에 속했고, 떠돌아 다니는며 일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직업적 유래의 흔적은 오늘날에도 이발소를 상징하는 빨강, 파랑, 흰색 표시에 남아 있다. 여기서 빨강은 동맥, 파랑은 정맥, 흰색은 붕대를 뜻한다. 유럽에서 외과의사가 완전하게 이발사와 분리되고, 의과대학에서 외과학이 별도로 교육과정에 포함된 것은 18세기에서 들어선 이후의 일이다. 

Joos van Craesbeeck,  발을 치료하는 이발사, 1600년대 초






해부학의 시대

렘브란트,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1632, Oil on Canvas, 216.5 × 169.5 cm, Mauritshuis, Hague

미술사에서 우리가 오늘날 떠올리는 외과의사와 유사한 이미지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에서부터인데, 렘브란트가 그린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는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그림은 렘브란트가 외과의사이며 해부학자였던 툴프 박사가 해부학 시연을 하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 그림의 주인공인 툴프 박사는 당시 암스테르담 의과 대학의 외과의사조합 회장을 25년이나 역임했고, 시장직도 네 차례나 지낸 암스테르담의 유명인사 였다. 1632년 그는 교수형을 당한 죄수의 시신을 공개 해부 시연했는데, 외과의사조합은 이 장면을  소재로 조합 회관에 걸 작품을 렘브란트에게 주문했고,  그 후 1년 뒤에 완성된 작품이 바로 이 작품이다. 

박사가 오른손에 겸자로 팔뚝과 손가락 근육의 형태적인 특징을 보여주면서, 왼손으로는 손가락의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해부학적 구조 뿐만 아니라, 그 기능을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해부 시신의 발밑에는 1627년에 암스테르담에서 출간된 아드리안 반 데르 스피헐의 <해부학 요강> 목판본이 펼쳐져 있다.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를 듣고 있는 7명의 ‘학생’은 툴프 박사의 제자인 의사들이라고도 하고, 시의 행정관들이라는 말도 있다. 화면 가운데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들고 있는 종이 쪽지에 적인 것들이 이들 참석자들의 이름이라는 얘기도 있다. 

참여한 사람들의 다양한 표정. 호기심 어린 눈빛들이 실감난다. 렘브란트는 단순히 참여자들의 얼굴을 그리는데, 치중하지 않고, 시연 현장의 긴장감과 생동감을 표현하고자했다.


렘브란트는 이 그림을 완성하고 작가로서 대단한 명성을 얻었는데, 바로 자칫 밋밋할 수 있는 그룹 초상화에 생동감과 활기를 불어 넣었다는 평가를 들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같은 해부학 시연 소재의 그룹 초상화를 보면, 렘브란트의 작품이 찬사를 받은 이유를 알 수 있다. 

Aert Pietersz.        Anatomische les van Dr. Sebastiaen Egbertsz., 1601-1603
Michiel Jansz. van Mierevelt Anatomy lesson of Dr. Willem van der Meer, 1617
The Anatomy Lesson of Cornelis 's-Gravesande by Cornelis de Man, 1681

가운데 시신을 놓고, 쭉 서서 일제히 화면 바깥을 바라보는 부자연스러운 그룹 초상화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렘브란트는 해부학 시연의 주인과 그 참석자들이 함께 하는 '살아 있는 이야기'와 '현장'를 담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무엇보다 탁월한 것은 적절한 명암 대비과 긴장감 넘치는 구도를 통해, 작품의 몰입감을 높이고, 등장인물들 각각의 심리와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했다는 점이다,

렘브란트의 작품을 비롯해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인체 해부 시연 장면이라는 독특한(?) 소재로 한 그림이 많이 그려진 것은, 당시 유럽에서의 의학과 해부학이 크게 발전했던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한다.


인체 해부학은 16세기부터 유럽 의학의 발전을 앞당기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16세기 안드레아 베살리우스(Andreas Vesalius,1514-1564)는 과학적 방법으로 인체를 구조와 기능을 연구하여 북유럽에서 처음으로 학문적인 해부학을 선보인 선구적인 학자이다. 그는 파도바 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1543년 불과 28세라는 젊은 나이에,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 (파브리카)>라는 저서를 발표해 이를 카를 5세에게 헌정했는데, 그는 연구를 통해 골격, 근육, 혈관, 신경계, 생식기계를 포함한 내부 장기, 심장과 폐, 뇌에 대한 광범위한 내용을 다루어 의학과 해부학에 혁신을 가져왔다.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가 1543년에 펴낸 <파브리카>에 실린 자화상, 하이델베르크 의대 해부학 연구실
<파브리카>에 실린 팔과 다리의 근육 해부도


베살리우스 이후, 파도바 대학 출신의 의사 파브리시우스는 1594년 처음으로 인체 해부를 공개적으로 시연하는 해부학 극장이라는 것을 세웠다. 17세기 유럽 대학들은 해부학 극장을 지어 더 많은 학생들을 유치하고 더 많은 기금을 확보하고자 했다. 당시 '황금 시대'를 구가하던 네덜란드의 많은 대학들에서도 인체 해부 공개 시연을 적극적으로 유치해서,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지식 발술의 장으로서 의과 대학의 명성을 높이려고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해부학적인 지식은 교양인들이 갖추어야 할 필수적 요소로 자리잡게 되었고 해부학 강의는 큰 인기를 누렸다.

(좌) 바르톨로메우스 돌렌도 동판화 <레이덴 대학의 해부학 극장>, 1609, 국립판화 수집실, 암스테르담

해부학 공개 시연은 보통 처형을 당한 죄수의 시신에 시연되었고, 보통 시신의 보존에 유리한 겨울에 열렸다. 극장은 보통 200-3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고, 외과 의사들 뿐만 아니라 시민들도 참여할 수 있었으며 방문자들은 입장료를 지불한 후 입장할 수 있었다.


암스테르담 시는 의사 자격을 취득한 가장 권위있는 외과의사를 전문강사로 임명해서 해부학 강의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이 해부학 전문 강사는 암스테르담에서 상당히 중요하 사람이었는데, 그들 중 일부는 위에 툴프 박사처럼 시장이 되거나 시정을 이끄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한편 화가에 의뢰해서 해부 전문강사와 수업에 참석한 외과의사들의 모습을 담은 그룹 초상화를 그리도록 하는 것이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잡았다. 현대 상당수의 그룹 초상화는 암스테르담 역사 박물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렘브란트, 요안 데이만의 해부학 강의(부분), 1656, 캔버스에 유채, 100 x 134 cm, 역사박물관, 암스테르담

<툴프박사의 해부학 강의>  이후 약 20여년 쯤 후에 그려진 렘브란트의 또 다른 해부학 시연 장면을 담은 그림이다. 사고로 그림의 윗부분이 소실되어, 완성된 작품의 일부만이 남아 있다. 화면 오른 쪽 상단에 두 팔만 보이는 인물이 데이만 박사인데, 박사는 이미 시신의 장기를 다 드러내었고, 두개골을 절단하여 뇌를 해부하고 있다. 옆에 서 있는 인물은 아마도 조수일 텐데, 조수의 손에는 떼어낸 두개골이 들려 있다. 시신의 발밑에 시점을 두어, 시신의 다리와 몸통의 모사를 과감히 생략하면서도 화면에 깊은 공간감을 만들어 낸다. 관람자들이 바로 시신의 발 앞에서 마주하게 되는 과감하고 참신한 구성에서 렘브란트의 노련한 감각을 엿볼 수 있다.





영웅적 의사의 초상

토마스 에이킨스, 그로스 박사의 해부학 강의(그로스 클리닉), 1875, 캔버스에 유채, 214x300cm, 필라델피아 미술관, 미국

시대는 다르지만, 19세기 후반 미국 화가 토마스 에이킨스(Thomas Eakins, 1844-1916)가 그린 <그로스 클리닉>은 렘브란트의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와 상당히 유사한 방식으로 외과의사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다만 그림의 주인공인 의사들이 시신이 아닌, 살아 있는 환자의 수술을 집도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는 차이가 있다. 이 그림에서 필라델리파의 유명 외과의사였던 사무엘 그로스 박사는 자신의 팀들과 함께 환자의 손상된 허벅지 뼈를 수술하고 있다. 

뒷쪽으로는 제퍼슨 의대 학생들이 계단식 강의실을 가득 매우고 있으며, 박사의 왼쪽에는 한 여성이 수술 장면을 가까이서 보기 끔찍한듯 눈을 가리고 있다. 화면 가운데는 오른 손에 메스를 든 채, 수술을 집도 하고 있는 그로스 박사가 서 있다. 긴장감 가득한 수술 현장에서 카리스마가 뿜어져 나오는 박사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작가는 미국 독립을 기념하는 1876년 필라델피아 세계박람회 미술전시에 이 작품을 출품하려 했지만, 수술장면을 다룬다는 이유로 거절되었고, 박람회장 병원에 전시 되었다. 앞서 본 렘브란트의 그림처럼, 해부학 수업 그림은 유럽에서는 일찍이 17세기부터 자주 다루어졌던 주제이지만, 미국에서 외과수술과 해부학은 근대 학문으로 일부로, 이러한 주제를 다루는 예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작품의 오른쪽 가장자리에  해부학 수업을 참관 중인 화가의 자화상이 들어가 있다. 최근 복원 작업으로 더 명확하게 보인다.

에이킨스는 미술대학에서 드로잉과 인체 해부학을, 그리고 제퍼슨 의대에서 인체 해부학과 인체 해부학과 인체 해부수업을 직접 참관했다. 제퍼슨 의대에서의 경험은 자연스럽게 '인체'에 대한 관심을 이어졌고, 한 때 외과의사가 될 결심을 하게 만들기도 했다. '사실주의자'인 에이킨스에게 인간 해부는 사실주의를 구현하는데 더 특히나 더없이 훌륭한 소재였다. 

토마스 에이킨스,애그뉴 클리닉, 1889, 캔버스에 유채, 214x300cm, 필라델피아 미술관, 미국

<애그뉴 클리닉> 역시 해부학 실습 현장과 외과의사를 다룬 작품으로, 1888년 펜실베니아 의과 대학에서, 은퇴를 앞둔 외과전문의 헤이즈 애그뉴 박사의 초상로 의뢰받아 완성한 작품이다. 애그뉴 박사가 유방 절제술을 시행하고 있는 장면인데, 화면 왼 쪽으로 흰 색 가운을 입고, 수술용 메스를 손에 쥔 채 서서 수술을 주관하고 있는 박사의 모습이 보이고,  화면 오른쪽으로는 세 명의 의사와 한 명의 간호사가 환자를 다루고 있다.

에이킨스가 그린 위 두 작품을 보면, 화가 자신이 해부학 강의 현장에서 느꼈던 '긴장감'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느껴진다. 등장인물과 구도, 색감과 명암, 붓터치 등 그림의 모든 요소에 현장에서 화가가 느꼈던 감정이 녹아있다. 그러면서도 강의를 주관한 인물인 그로스 박사와 애그뉴 박사의 탁월한 수술 실력과 지적인 면모를 영웅적 이미지로  묘사하고 있다. 

에이킨스가 활동하던 시기는 이미 사진이 존재하던 시절이었고,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화면에 담아내는 역할이 그림이 아닌 사진에게 내어주고 있던 때였다. 하지만, 에이킨스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어떠한 사진도 표현해 내기 어려운 살아숨 쉬는 현장의 '에너지'와 인물들의 개성이 느껴진다. 











※ 참고문헌

전주홍, 최병진, <의미, 의학과 미술 사이>, 2016, 일파소

노성두, <빛의 유혹에 영혼을 던진 렘브란트>, 2003, 아이세움

박광혁, <미술관에 간 의학자>, 2017, 어바웃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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