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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Sep 21. 2024

멀리서 오다

내가 그곳에 있었다

  풀밭에 누워있는 꿈을 꾸었다. 무채색의 하늘과 따끔한 잔디. 내 꿈의 풍경은 곧 죽어도 푸르거나 붉어볼 생각은 없는가 한다. 구름이 멈추었는가. 또는 내 시간이 멈추었는가. 그래. 어디손가 본 적 있는 바로 그 하늘. 흐린 날의 아래에 반드시 시커먼 한 남자가 서 있을 테다. 질렀던 단말마의 비명은 메아리조차 남기지 못하였으니, 삼킨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사람에 대해 이런저런 말들이 오간다. 약속들. 끝내 지켜지지 못함에도 의미란 것을 스을적 담아 건내는 약속들. 가짜일지라도 굳게 진짜라고 믿어 가진다면, 가짜와 진짜는 무엇으로 가짜를 가짜라 할까. 그것 참 난해하다. 돌고 돌아 나는 텅 빈 것을 채워넣고 있는 줄 알았더니만, 내가 걸어온 진짜 길들에 가짜의 조각들이 난리다. 비우고 있었나, 가짜로 가득 찬 공간을.


  바르게 걸어가면 다섯 걸음도 충분할 곳으로 가는 길에 여러 표지판을 놓아본다. 좌. 우. 뒤돌아서 틀었다가 다시 바르게. 꼬인 길로 숨겨보면 무슨 소용인가. 고개만 들어도 휑한 벌판의 끄트머리 그곳은 참으로 잘 보이는걸. 그래도 속아주련다. 표지판을, 그 가짜를 따라 걷는다. 슬며시 흘린 웃음과 멍청하게 내딛은 발걸음이 마음을 달랜다면 그만 아닌가.


  그리하여 진실된 길을 걸어 닿은 곳에는 무엇이 있을 것 같았나. 다만 내가 그곳에 있었다. 또한 갈 길은 스무 갈래도 넘게 빨아들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 그래. 나는 온 생을 다하여 그곳에 있었다. 발자국이 영혼을 담았다면 흘러내린 자국이 반드시 남는다. 검붉은 자국과 함께, 내가, 그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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