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번을 하고도 세 번을 더하여
태어남으로 하여금 서사를 토하는 생(生)이란 그야말로 이를 데 없이 끔찍한 것이다. 아이란 첫 숨을 들이쉰 직후에 세상이 떠나가라 울며 원치 않는 고통의 도가니에 내던져지는, 동정받아 마땅한 덩어리다. 그러니 그 비극의 시작을 축복하는 인간의 언어란 얼마나 보잘것없고 또한 구역질나는 것인가.
매년 생의 시발점에 박수를 보내는 이들을 보라. 아, 그것들은 마치 아물어가는 상처에 베긴 피딱지를 긁어 잡아뜯는 것만큼이나 못되고 심술궂은 짓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몇 번이고 벅벅 비벼 생을 지워내고만 싶은 마음이다. 그럼에도 모든 순간이 길게 베어진 상처의 선혈(鮮血)이 비롯된 칼끝을 다시 눈앞으로 갖다댄다.
나는 차라리 달려가겠다. 삶의, 지독하고 피곤한 이야기의 결말로 달려가겠다. 그러니 어떤 연유로 나에게 살아간다고 말할까. 고난의 종식이 내가 기도하는 축복이니 이는 죽어간다는 응원이 어울릴 것이다. 낙엽이 서서히 추락하는 시월의 다섯 번째 날에 내지른 비명이 같은 날에 잦아들기를 바라어본다.
그렇게 스물 세번째로 마음에 그어버린 생채기는 이전의 것들이 그러하였듯 나을 기미도 없이 피고름을 머금고 부풀어오른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결말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고 되새기면서, 진즉에 매듭지었어야 할 지저분한 생의 마침표를 이다음 해의 가을날로 딱 한 번만 더 미루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