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묘> 리뷰
20년도 넘었다. 귀신 나오는 영화라니. 고등학교 때 단짝 친구, 그리고 그 친구의 소개로 썸을 탈 뻔한 처음 만난 어떤 남학생과 셋이서 여고괴담 2를 본 이후 영화관에서 귀신 이야기에 몰입한 것은 처음이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이번 영화도 그랬다. 하와이에서 만난, 좋아라 하는 친구들, 오직 이 친구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좋은 추억을 하나라도 더 만들고 싶어 따라나섰다. 혼자서라면 영원히 선택하지 않을 영화였지만.
이름부터 기묘하지 아니한가. 파묘라니. 멀쩡한 묘를 왜 파나. 무당도 나오고 굿도 한다고 들었다. 귀신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본 적도 없고 내 신념과 다를 것이 분명한 이 영화의 세계관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특히 깜짝깜짝 잘 놀라는 내 성격상 얼마나 어깨를 들썩이고 소리를 내며 친구들의 영화 감상을 방해할지 그런 것들이 신경 쓰일 뿐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이 영화에 감동받았다. 생각했던 것만큼 무섭지 않았고 구체적인 내용을 모르고 갔기 때문에 더 뜻깊었다. 이 글의 제목처럼, 이 영화는 '귀신'으로 시작해서 '애국'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자제하겠지만 이제부터는 영화 내용이 아주 약간 드러날 수 있으니 참고. 하지만 미리 알고 봐야 놓치지 않고 볼 수 있는 팁이다.
우선, 이야기 주제가 중간에 애국으로 전환되기 때문에 전반부에 봤던 귀신을 잊어버렸다. 그래서 생각보다 무섭지는 않았지만 집에 돌아와서 뇌리에 잊히지 않는 두 장면이 있었다. 이 때문인지 나는 새벽 2시에 불현듯 잠에서 깨어 목사님 설교를 틀어놓고 다시 잠을 청해야 했다.
나의 뇌리에 남은 장면은 영화적 요소로 나타난 연출 때문인데 이것이야 말로 귀신 소재 영화의 묘미라 하겠다. 나중에 이 영화에 숨은 의도와 해석을 아주 길게 풀어놓은 자료를 친구가 보내주었는데, 그걸 읽고서야 그 무서운 한 가지 장면에서 풀려났다. 알고 보니 나를 오싹하게 한 모습은 사람을 괴롭히려는 나쁜 의도가 아니라 너희를 괴롭히지 않고 가고 싶다고 도움을 청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장면은 전화를 걸어 아주 긴박하게 의사결정을 하도록 몰고 가며 사람을 속이는 것이었는데, 말을 차분히 끝까지 들어보면 진실을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급하고 무서운데 사람이 그렇게 침착하기는 어렵지만 정신만 차리면 호랑이굴에서도 살아 나온다는 우리 속담이 얼마나 명언인지 다시 한번 떠올렸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여러 개의 장(chapter)을 모아 이야기를 차근히 쌓아나가는 것이다.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나 리들리 스콧의 '라스트 듀얼' 같은 영화는 각 장마다 다른 인물의 관점을 통해 이야기의 숨은 구석을 비춰주는데 이 영화는 그런 관점의 변화 없이 이야기의 초점이 이동하며 줄거리가 깊어진다.
나는 영화를 볼 때 언제나 나에게 주는 개인적인 영감을 찾는 것을 즐긴다. <파묘>에서는 인간, 귀신, 영적 존재의 차이와 능력에 관한 것이었다. 극 중 무당 화림(김고은 분)은 이 영화를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설명을 대사로 전한다. 혼령은 육신이 없기 때문에 육신이 있는 사람을 이길 수가 없다고. 그러나 정령은 육신이나 물체와 결합하여 이기기 어렵다고. 인간의 삶이 얼마나 고귀한 지, 물리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결합이 얼마나 놀라운 지를 보여주는 통찰력 있는 대목이다.
문화에 따른 귀신의 정체성과 특징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한국 귀신은 주로 한이 많고 한을 품은 대상에게만 해를 가한다. 일본 귀신은 대상에 제한이 없고 가까이 가면 다 해친다. 우리나라는 인과응보 사상이 뿌리 깊어 나쁜 일이 일어나면 뭔가 잘못을 해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일본은 자연재해가 많아서 착하게 살아도 이유 없이 나쁜 일을 당한다. 그래서 그 신을 섬기고 달래는 것에 익숙하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천혜의 자연환경을 누리는 하와이에서는 만물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여긴다. 자연 그대로가 신성하고 아름다운 신이다.
영화 설정상 귀신은 사람이 문이나 창문을 열어주어야 들어온다. 사실 귀신이 영적인 존재인데 물리적 문이 무슨 소용일까 싶지만, 사람이 허락해야만, 오직 그때만 귀신이 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 연출 의도일 것이다. 이 점은 뇌리에 박힌 무서운 장면에서 벗어나는 데도 도움이 됐다. 내가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한 그 장면이 나에게 해를 끼칠 수는 없을 테니까.
이 영화는 일제 강점기와 독립운동, 해방을 유념해서 지켜보면 숫자와 이름에 많은 상징이 묻혀 있다. 나는 모르고 봤지만 차 번호판에 1945, 3.1, 8.15 같은 것들이 숨어 있다. 극 중 인물 이름도 친일파였거나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의 이름에 착안했다고 한다. 비록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이름은 손에 꼽았지만. 이 영화가 귀신 이야기로 시작해서 애국으로 마무리된다는 점을 알고 가면 좋은 이유다. 공포 영화를 조금은 덜 무섭게 즐길 수 있고, 영화적 요소를 찬찬히 따라가면서 음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영화의 메시지는 우리가 싸워 이겨야 할 것은 귀신이 아닌 다른 그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