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호기심이었어. 강의실에 못 보던 사람이 앉아있었는데 복학을 했다고 하더라. 첫인상은 하얗다. 왜냐하면 얼굴이 하얗기도 했고 흰색 후드집업을 입고 있었거든. 세상 귀찮아 보이고 뚱해 보이는데 묘하게 신경 쓰이는 타입이었지. 말을 걸 용기는 없어서 힐끔힐끔 바라보기만 했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느낌만 보고 좋아할 수 있을까? 정답은 그렇다야. 그때의 나는 모태솔로에 남자에 대한 환상까지 가지고 있었으니까. 누군가를 뭣도 모르고 좋아하기에는 충분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지.
그를 '눈사람'이라고 칭할게. 눈사람은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했어. 나는 기숙사에 살았는데 친구가 같이 저녁을 먹자고 해서 내려가던 길이었지. 그때 신호를 기다리던 눈사람과 마주쳤어. 한참을 고민하다가 신호가 바뀌기 전에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했어. 웃으며 받아주더라. 난 아직도 그 상황을 잊지 못해. 설레발치며 몇 날며칠을 그 웃음을 야금야금 떼어먹고 살았는지 몰라.
어느 날인가 지인이 겹쳐 우연히 술자리를 가지게 됐었지. 그 이후로 좀 친해졌어. 내 착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저것 핑계 삼아 연락했던 걸 알까? 눈사람 집 근처에 붕어빵 가게가 있었는데 붕어빵을 핑계 삼아 붕어빵 사러 왔는데 오늘 영업 안 하신다고 찡찡거리기도 하고, 기숙사는 눈 감고도 걸어가는데 밤길이 어둡다고 보조배터리를 빌려달라고 연락해서 얼굴 한 번 보고, 영화 취향이 같았을 때는 너무 기뻤고 좋아하는 영화라길래 새벽에 3시간짜리 영화도 봤어. 지인들과 모임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이 겹쳤을 때는 들어가기 아쉬워서 아이스크림을 먹자고 조르기도 했지. 이것까지 눈사람은 아무것도 모를 거야. 알면서도 그랬으면 좀 나빴고.
짝사랑은 생각보다 아프더라. 내가 먼저 연락을 하면 눈사람은 받아줬지만 절대 먼저 연락을 하는 법이 없었지. 그 무렵 연애를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멀어졌는데 몇 가지 알게 된 사실이 있어. 나는 누가 나를 좋아해서 만나는 것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는 게 더 행복한 사람이라는 거야. 연애를 하는 도중에도 눈사람은 녹지를 않더라.
졸업하고 나서도 종종 만났었지. 연극도 보고,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어느 날 문득 이 관계는 나의 미련으로 지속되고 있구나-라는 걸 깨달았던 것 같아. 나만 놓으면 그대로 멀어지는 관계였지. 짝사랑을 하던 내가 그리웠던 건지, 지난날의 추억보정인 건지. 외로워서인지. 두근거림이나 설렘은 없는데 왜 이 관계를 놓지 못하는 건지. 이런 불순한 마음으로는 지인으로 남는 것도 실례라고 생각했어. 내가 먼저 연락하지 않으니 관계는 이어지지 않더라. 혼자 시작했다가 혼자 마무리 짓고, 그 끝을 알아주는 건 나밖에 없다는 게 좀 허망해.
아직도 붕어빵만 보면 눈사람 생각이나. 그때의 순수하고 어렸던 내가 그리웠던 것 같아. 그냥 눈도 오고, 세상은 하얗고, 곳곳에 눈사람이 있길래. 사랑이야기나 한 번 해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