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의 겨울은 영하 14도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다.
나는 토성의 견고한 빛을 받으며 염소자리에서 태어났다. 1윌의 맑은 날 저녁이었다.
기록의 발달로 우리는 자신의 태어난 날의 날씨와 별들의 위치를 클릭 한 번으로 알 수 있다. 내가 태어난 날의 최고기온은 영하 5.7도, 최저기온은 영하 12.4도, 평균 운량(amount of clouds)은 0.0, 구름 하나 없이 푸르고 시린 날이었다. 어머니는 전 날부터 진통을 느꼈다고 했는데, 그날의 최저기온은 영하 13.9도로 그 겨울의 가장 추운 날이었다. 나는 혹독한 추위의 절정을 찍고 봄으로 향하는 첫 번째 날에 태어났다. 새로운 따뜻함의 시작이었다.
내 부모님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으나, 그들은 신의 따사로움 속에 있지 않았다. 그들의 신앙생활은 고통 속에서 신을 찾아 기어들어간 겨울 짚단 속의 지네 같았다. 그들이 자신의 독 속에 있었으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다섯 번째 계명과의 괴리는 나를 또 다른 종류의 괴로움으로 떠밀었다. 그 계명이 없었더라면 나는 더 빨리 그들을 사랑했을 것이다. 괴리와 싸울 필요 없이 본능에 따라 미워하고 본성에 따라 사랑했을 것이므로.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불행을 자랑처럼 늘어놓고 싶어 한다. 그러나 나에게 그건 실패한 레시피북을 출판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리 솔직하게 썼다고 해도 실패한 요리법만 가득한 레시피북은 아무도 읽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건 특별한 통찰이나 새로운 맛을 주지 못하고 그저 '이런 망한 맛도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에 그쳐버린다. 사람들은 실패만 가득한 책을 사고 싶어 하지 않는다. 패배와 좌절을 딛고 일어서 승리한 레시피를 소장하고 싶어 한다. 백번 양보해 승리에 미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이기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이야기를 갖고 싶어 한다.
토성은 온갖 먼지와 암석이 충돌하는 혼돈 속에서 수많은 파괴를 견디고 자신만의 고유한 궤도와 질서를 만들어냈다. 태양계 행성 중 목성 다음으로 큰 별이며 거대한 얼음고리를 가지고 있는 토성은 가스로 이루어진 가스행성이다. 질량이 가벼워 물에 띄울 수도 있고, 기체의 특성상 고체보다 흩어질 가능성이 높았으나 모든 악조건 속에서도 자신만의 얼음 고리를 만들어 내었다. 끊임없이 격변하는 표면의 기체 패턴 속에서도 신비로운 질서를 유지하며 천천히 우주를 비행한다.
토성은 태양개의 행성 중 가장 긴 29.5년의 공전 주기를 가지고 있다. 태양계의 가장자리에서 느리지만 꾸준히 움직이는 이 행성은 경계와 인내의 상징이며 규율의 행성이다. 또한, 염소자리는 전통과 질서를 중시하는 별자리다. 나는 어릴 때부터 마치 내면의 도덕적 나침반이 있는 것처럼 규칙을 어기는 것에 불편함을 느꼈다.
나의 강직함은 진리를 추구하고 계명을 지키는 쪽으로 삶을 이끌었다. 심지어 나는 그것들을 지키려고 특별히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나의 가장 큰 경외심은 자연스럽게 법과 도덕과 신의 질서를 따르는 것들에게 닿았다. 정의의 실현을 위한 현대의 제도적 장치들과, 양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타인을 나 자신처럼 여기는 황금률을 사랑했고, 중력이 행성들을 궤도에 머물게 하는 정밀함과 별빛이 수백만 년을 여행해 우리에게 도달하는 신비, 자연에서 관찰되는 모든 프렉탈구조의 아름다움을 흠모했다.
내 경외감은 세계의 질서를 지키는 모든 것들에게서 온다. 자연의 거대한 정화시스템인 비와 구름을 사랑하며, 대류의 결과인 바람을 동경한다. 생명을 살아있게 하는 모든 종류의 순환을 찬탄하고, 그 위대한 섭리를 지탱하는 부품의 하나로써 작동하고 싶어 한다. 거대한 우주의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 찰나지만 신의 온전한 도구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한다. 내가 지구의 모든 것으로부터 왔으며, 우주의 원소로 이루어져 있고, 죽은 후에 흙으로 돌아가 다시 생명을 기르는 순환의 일부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내게 주어진 생명의 가치를 더욱 특별하게 한다.
생명의 순환을 숭고하게 여기듯, 글쓰기 또한 하나의 중요한 순환으로 경배한다. 자연이 물을 증발시켜 구름으로 만들고 다시 비로 내려 대지를 적시는 것처럼, 글 또한 경험을 언어로 증류시켜 새로운 감정으로 마음에 내린다. 사진이 빛의 궤적을 기록하고 영상이 세상의 파동을 물리적으로 포착한 후에 남겨진, 모든 기록되지 못한 무형의 감정과 세상의 흐름을 글은 기꺼이 담아낸다. 글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하며, 모든 잊혀 가는 것을 간단한 기호의 규칙으로 박제한다.
글쓰기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탄생의 한 가지 방법이다. 내가 느낀 경외심을 글로 옮기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흘러가버린 과거의 것이 아니게 된다. 그 글을 읽는 이의 마음속에 새로운 경외심이 태어나고 또 다른 감동으로 새로이 싹튼다. 사유가 글로써 한 사람만의 생각을 벗어나 타인의 사고로 옮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의 경험이 수많은 마음을 거쳐 새로운 의미로 거듭나는 것이야말로 글쓰기가 만들어내는 가장 아름다운 순환이다.
이를 위해 인간은 문자를 발명해 냈다. 인공물과 자연물의 경계는 여전히 철학적 담론을 제시하나, 자연물의 정의를 자연물에서 태어나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고, 성장할 수 있으며, 스스로를 가리킬 수 있는 것으로 가정할 때, 나는 글이 자연이라고 주장하겠다. 글은 살아있다.
많은 사람들이 슬플 때 글이 잘 써진다고들 말한다. 슬픔을 기록하는 이유는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마음속 응어리진 감정을 토하듯 써 내려가며 위안을 얻는 것은 글쓰기의 중요한 기능이다. 하지만 진정으로 가치 있는 글은 그 슬픔을 넘어선 곳에 있다. 기쁨과 경외심을 기록한 글은 다른 이에게 희망을 전하는 도구가 된다. 한 사람의 마음이 다른 이의 마음에 새로운 빛을 켜는 것이다.
경외감이 가져다주는 또 다른 깊은 변화는 자기 축소이다. 자연과 우주 그리고 신 같은 거대한 대상 앞에서 우리는 일상의 걱정과 하찮은 이기심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우주의 작은 일부로 인식하게 된다. 자신의 문제에 매몰되기보다는 시선을 외부로 돌려 주변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이 시선의 확장으로 인한 부감효과는 경외감의 대상이 가진 압도적인 크기와 의미에 비추어 자신의 문제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게끔 한다. 이런 시각의 전환으로 우리는 일상의 문제들이 더 이상 압도적이지 않음을 깨닫게 되며, 바로 이 순간을 포착해 글을 쓰면 복잡했던 감정들이 글 속에서 명료해지며 마음은 평온에 이른다. 글쓰기가 단순한 기록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점을 얻고 더 넓은 세상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재발견하게 되는 성찰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경외감은 개인의 감정을 넘어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강력한 끈이 되기도 한다. 타인의 용기나 친절, 강인함을 목격할 때 느끼는 경외감은 가장 깊은 형태의 감동이다. 이 감동을 글로 옮겨 타인의 위대함을 기록하는 일은 그 감동을 증폭시켜 나누려는 우아한 시도다. 이런 시도를 통해 감동의 의미와 근원을 탐구하게 되며, 나아가 도덕적이고 선한 행동에 대한 열망을 세계에 퍼트릴 수 있다.
기록은 자신을 위한 행위일 수 있으나, 글은 타인을 향한 행위다. 이타적 산물에는 책임이 따른다. 타인과 나누는 모든 감정에는 공감의 임계점이 있다. 어떤 감정이든 그 임계점에 미치지 못하는 내용이 담긴 글은 감동 대신 피로감만을 안겨준다. 실패한 레시피만 모아 놓은 요리책은 아무도 찾지 않는 것처럼, 실패는 누구나 겪는 일이기에 그 자체만으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그 실패를 어떻게 딛고 일어서느냐이다.
내가 지향하는 글쓰기는 성공한 레시피북이다. 혹독한 추위와 아픔 속에서도 경외심이라는 성공의 맛을 찾아 기록하고 싶다. 그렇게 쓰인 글은 겨울의 가장 추운 날을 딛고 일어선 봄맛의 레시피 첫 장이며, 순환하는 우주의 일출이 될 것이다.
내가 태어난 그날처럼 누군가의 삶이 혹독한 겨울의 절정을 찍는 순간에 내 글이 닿기를 바란다. 내가 1월의 가장 추운 밤을 딛고 새로운 따뜻함의 시작이 되었듯, 내 글 또한 누군가에게 작은 것이라도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하고 잊고 있던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씨앗이 되기를 원한다.
나는 글을 통해 경탄이라는 씨앗을 심고, 그것을 통해 세상의 새로운 순환을 만드는 존재다. 이것이 내가 글을 쓰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며, 계속 글을 써나가는 힘이다.
※ 첫 문장은 헤르만 헤세의 《나로 존재하는 법》중 '짧게 쓴 자서전 중에서'의 앞부분을 차용하였습니다.
원문은 'Ich wurde im Zeichen des Krebses geboren, unter dem milden Schein Jupiters''나는 목성의 부드러운 빛을 받으며 게자리에서 태어났다.'입니다.
그동안 빵세이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빵과 삶을 엮어 은유하는 동안 누구보다 행복한 건 글을 쓰는 저였습니다.
더 진한 성찰과 글맛이 살아있는 시리즈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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