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함이 얼룩지지 않도록
돌아가신 할머니 댁 근처 햄버거집에 갔다. 오래된 연립 주택이 밀집한 그 동네는 골목마다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어르신들이 지팡이를 짚거나 유모차를 밀며 지나가는 풍경이 익숙한 곳. 그 낡고 조용한 동네 어귀에 붉은색 간판을 단 햄버거 가게는 마치 다른 시공간에서 뚝 떨어진 섬처럼 보였다.
할머니 생각이 나서였을까, 아니면 그 이질적인 풍경이 궁금해서였을까. 홀린 듯 매장 문을 열고 들어갔다.
키오스크에서 치즈버거를 결제하고 영수증을 받으니 오전 11시 53분이 찍혔다. 본격적인 점심 전쟁의 시작이었다. 주방 안쪽에서는 주문 알림음이 쉴 새 없이 울려 댔고, 헬멧을 쓴 배달 기사들이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매장 안은 정신없이 바빴지만, 창가 쪽 테이블만은 다른 세상 같았다.
백발이 성성한 노부부가 앉아 계셨다. 두 분은 마치 데이트를 하러 나온 소년 소녀처럼, 햄버거 포장지를 조심스레 벗겨내고 계셨다. 패스트푸드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그들의 식탁 위 시간은 아주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전쟁터 같은 점심시간의 소음 속에서, 햄버거를 오물오물 베어 무시는 모습이 묘하게 애틋하게 다가왔다. 그 이질적인 풍경이 왠지 모르게 정겨워 멍하니 바라보던 찰나였다.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할아버지의 손에서 콜라 컵이 미끄러졌다. 검은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고, 얼음 조각들이 요란하게 굴러다녔다. 생각보다 큰 소리에 매장 안의 시선이 쏠렸다. 하지만 바쁜 사람들은 ‘어르신들이니까’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눈치였다. 정작 얼어붙은 건 할아버지였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고, 할머니는 어쩔 줄 몰라하며 냅킨 몇 장으로 그 흥건한 액체를 닦으려 애쓰셨다.
그 순간, 나는 노부부의 등 뒤에서 두려움을 보았다. 그것은 단순히 음료를 쏟았다는 실수의 당혹감이 아니었다. 젊은이들의 공간에서 민폐를 끼쳤다는 자책, 나이 듦이 초래한 실수에 대한 수치심 같은 것들이었다. 그 고립된 당혹감을 감지한 순간, 나라도 도와야겠다는 생각에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던 그때, 카운터 너머에서 직원이 대걸레와 행주를 들고 바람같이 달려왔다.
“어르신, 다치신 데는 없으세요? 옷에는 안 튀셨어요?”
직원은 가장 먼저 콜라로 흥건해진 노부부의 테이블부터 재빠르게 닦아냈다. 옷에 튀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하는 손길이었다.
"잠시만요, 금방 새것으로 가져올게요!"
직원은 숨 돌릴 틈도 없이 새 콜라를 들고 돌아왔다. 그제야 정신이 든 할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지갑을 꺼내려하셨다.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내가 돈을 다시 낼게요."
"아유, 아니에요! 컵이 미끄러워서 저도 자주 놓치는걸요. 괜찮습니다."
직원은 손사래를 치며 웃어 보이고는, 무릎을 굽혀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여기까지는 훌륭한 친절이었다. 하지만 그다음 이어진 직원의 질문은 친절을 넘어선 어떤 품격이었다. 직원은 바닥 청소를 하면서, 여전히 미안함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할머니와 눈을 맞추며 자연스럽게 말을 건넸다.
“근데 두 분, 햄버거 되게 잘 드시네요? 사실 어르신들이 우리 가게 오시면 저는 참 좋아요. 소화 안 돼서 못 드시는 분들도 많거든요.”
그 말에 잔뜩 움츠러들었던 할머니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우린 없어서 못 먹지. 늙은이들이 주책인가 싶어서 자주 못 오는데..."
"무슨 말씀을요! 젊은 사람들도 소화 안 된다고 남기는 경우가 많은데, 두 분은 정말 잘 드시네요. 그만큼 정정하시다는 증거죠. 햄버거 드시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습니다. 앞으로도 자주 오세요!"
직원의 센스 있는 칭찬에 할머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고, 죄인처럼 굳어있던 할아버지의 어깨도 슬그머니 으쓱 올라갔다. 그 짧은 대화는 ‘실수해서 폐를 끼친 노인’을 순식간에 ‘젊은 감각을 유지한 건강하고 멋진 단골손님’으로 바꿔놓았다.
직원은 바닥의 콜라 얼룩만 닦은 게 아니었다. 노부부의 마음에 스스로 새길 뻔한 무안함과 주눅 듦의 얼룩까지 말끔하게 닦아낸 것이다.
나는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물며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짭조름한 치즈 맛과 함께 따뜻한 온기가 목으로 넘어갔다. 나는 교실에서 아이들이 실수를 저질렀을 때, 그 직원처럼 대처했던가. 아이가 음료를 쏟거나 과제를 빼먹었을 때, 그저 뒤처리를 해주거나 핀잔을 주진 않았던가. 그 아이가 무안하지 않도록, 쏟아진 음료보다 그 아이의 마음을 먼저 닦아주었던가.
가장 분주했던 시간 속에서 피어난 그 짧은 장면이, 입안의 치즈보다 더 진하게 가슴에 남았다.
우리는 흔히 단순히 돕는 것을 다정함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진정한 다정함은 상대가 도움을 받는다는 사실조차 잊게 만들고, 상대의 존엄을 지켜주며 그 상황을 유쾌하게 넘기는 센스에 있었다. 바쁜 와중에도 달려와 실수를 덮어주는 것을 넘어, 그 실수가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지 않도록 대화의 물꼬를 건강과 젊음으로 돌려놓는 직원의 태도. 그것은 내가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아니 한 사람으로서 타인에게 보여주어야 할 다정함의 정수였다.
만약 우리 할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나도 할머니 손을 잡고 이곳에 올 수 있었을까. 콜라를 쏟으셨더라도, 저 직원처럼 웃으며 “할머니, 여전히 정정하시네요!”라고 말해줄 수 있었을까.
직원이 다시 전쟁터 같은 카운터로 복귀하고, 노부부는 다시 도란도란 햄버거를 드시기 시작했다. 검은 얼룩과 함께 당혹감마저 말끔히 닦여나간 듯, 두 분의 점심 식사는 다시 평화로워졌다.
매장을 나서는 길, 발걸음이 가벼웠다. 낡은 동네의 햄버거 가게. 그곳에서 나는 오늘 가장 세련된 다정함을 맛보았다.
콜라가 쏟아진 자리에 남은 건 끈적함이 아니라, 뽀송뽀송한 사람의 온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