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은 일본이었다.
첫 번째 이야기.
전날 나눈 대화는 L을 더 알기 어렵게 만들었지만, 어쨌든 나는 L을 좋은 친구로 추억에 남기겠노라 결심한다. L이 토해낸 진심은 그를 안쓰럽게 보이게 하였고, '너한테만 말해주는 비밀'이라며 해준 이야기는 날 특별하게 만들었으니. 더군다나 나의 이름이 담긴 그 선물은... 의미를 알 수 없지만 고마움의 증표 정도로 간직할 수 있을까? 너는 나에게 항상 진실만을 얘기했던 사람이니까, 그래서 잘 이해는 할 수 없지만 너를 놓치고 싶지 않다. 내가 수많은 텍스트로 그려왔던 너라는 사람을 깨고 싶지 않다. 그런데 내가 많은 것을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은 마음 아프다. 순수한 눈빛을 가진 친구에서 나에게 솔직하지 못한 비밀을 간직했던 사람으로 바뀌어간다. 너가 나를 therapist로 생각해왔다는 것은 내게 너무나 큰 상처가 될 것임을 안다. 너의 진심이 헷갈린다. 내가 확실히 얘기했지, 너의 옵션이 되고 싶지 않다고. 너의 바로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부터 몇 번이고 심장이 가라앉았고, 마음을 숨겨가면서 너를 위로해야 했다. 날 속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제쳐두고, 배신감과 상실감은 잠깐 무시하고, 너를 진심으로 위로해야 했다. 너는 너답지 않게 눈물을 보이며 내가 얼마나 고마운 사람인지를 말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다 생각이 바뀐다.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생긴다. 그리고 너는 이제 상처가 두려워 용기 내지 못한 사람으로 바뀌어 존재한다. 그렇게 L은 일말의 용기를 냈을 때 받을 상처를 감당할 용기가 없었기에 그 어떤 것도 극복하지 못한 채로, 어떤 것도 선택하지 못한 채로, 어떤 것도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채로 남는다. 상처를 받지 못해 결국 상처에 무뎌지는 성숙함을 겪지 못한 사람으로 내게 기억된다.
로마에서도 빌었듯 이번에도 나의 소원은 과거를 후회하지 않고, 미래를 걱정하지 않으며, 나에게서 행복을 찾기를, 이다. 올라갈 때보다 계단을 조심히 디디며 내려간다. 모든 것을 좇기보다 무엇을 놓아줄 수 있을지에 내 생각 한 편을 내주기로 한다. 난 무엇을 놓아줄 수 있을까? 우리 양옆으로는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바람과 소망들이 나란히 존재한다. 토리이라고 한다. 바래고 잊힌 소원들을 지나치며, 보이지 않는 소원에 운명을 맡기는 인간의 나약함을 떠올린다. 운명에 모든 것을 맡기는 나약함과 나는 거리가 멀다며 우쭐해하는 것도 잠시, 나는 지금 발을 헛디디지 않기 위해 계단 하나도 조심스레 밟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떠올린다. 그저 나를 만들어준 수많은 순간들이 떠오른다. 이제서야 그 모든 것에 감사하면서 앞으로의 완벽에 나를 가두지 않기로 한다.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었다, 라는 아름다운 문장에 나를 녹여본다. 그리고 그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은 애매함 속에 나를 놓아본다. 가벼운 말들로 끝없이 자라나는 걱정과 불안은 잠재우면서. 확실할 수 없다면 그저 믿는 수밖에.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무력감을 느끼기보다는 가벼운 믿음과 꿋꿋한 미소로 그저 나를 놓아보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L의 눈물을 떠올린다.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그 감정이 나에게 전이되어서, 이해하지 못할 슬픔을 느끼면서, 너를 이해한다고 착각하듯 느끼면서, 나에게 생긴 눈물을 꿀꺽 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