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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병철 Jun 07. 2024

마스터스 오브 로마 2.

제 2 부 풀잎관

제 2 부 풀잎관

     

부제가 풀잎관이다.

풀잎관과 월계관의 차이가 무엇일까 내심 궁금하였는데, 작품의 내용을 참고로 검색을 해보니 다음과 같은 상이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풀잎관(Corona Civica)은 동료들의 생명을 구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사람들에게 장병들이 직접 만들어 기증하는 것으로서 희생에 대한 감사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반면에 월계관은 승리의 상징으로 개선장군들에게 허락되는 상징이다. 둘 다 명예의 상징이지만 전자는 희생과 봉사에 대한 동료들의 감사를 담고 있고, 후자는 승리와 성취에 대한 표상으로 해석될 수 있겠다.     


한편, 사투르니스의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가고 사투르니스를 지원했던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정치적 입지가 매우 흔들리게 됨에 따라, 마리우스는 정치 일선을 잠시 떠나 가족들과 함께 아나톨리아 반도(현 튀르키에 지역) 일대를 여행한다.

당시 아나톨리아 반도는 여러 왕국이 공존하고 있었으며, 비티니아, 카파도키아 등은 로마의 속주이거나 우호적 동맹을 맺고 있었고, 폰토스와 아르메니아 등 북동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나라들과는 대치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 중에서 폰토스의 왕 미트리다테스 6세는 야망과 실력을 겸비한 위협적인 존재로서 그의 거취는 반도 내부의 평화와 안정을 희구하는 로마로서는 항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다른 한편, 로마는 비록 공화정이라는 정치체제를 갖추어 안정된 정국을 이어가는 듯 하였으나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지역적 차별에 따른 신분적 갈등은 그 모순을 더 해 가고 있었다.

당시 도시국가인 로마를 중심으로 그 주변을 라티움 지역이라 하였고, 그 외 지역은 모두 이탈리아라는 지방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시민권 또한 로마시민권과 라티움 시민권만이 존재하고, 그 외 지역들은 이탈리아 동맹으로만 남겨져 있었다. 이탈리아 동맹 지역은 로마에 세금을 내야 했고 전쟁이 발발하면 자신의 젊은이들을 전장으로 내보내야만 했으며 전쟁 물자도 자비로 부담해야했다. 즉 의무만 있고 그에 따른 권리는 없는 착취의 대상이었다.

참고로, 로마 시민권자는 당연히 참정권이 있었으며 태형을 받지 않았고 로마식 재판을 받을 권리와 항소권이 있었다. 라티움 시민권이란 로마 시민권과 이탈리아 동맹시의 비 시민권자 사이의 중간 단계 시민권으로서 로마 시민권자와 계약을 맺고 그 계약에 대해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었으며 로마 시민과 결혼하거나 사형선고에 항소할 수 있었다.     

급기야 기원 전 91년 호민관에 당선된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자신의 출신이 귀족 가문임에도 불구하고, 로마 시민권을 전 이탈리아로 확대하는 법안을 제출한다. 드루수스는 로마 군사 8만 명이 몰살당하는 아라우시오 전투에서 구사일생으로 생존하였는데 이때 그는 로마 정치 체제의 변혁을 계획하게 된다. 이는 기득권 귀족은 물론 로마 시민권이 있는 유산계급 뿐만 아니라 무산자들의 엄청난 반대에 부딪혔고 결국 드루수스는 살해당했다. 이것이 이탈리아 동맹 시들의 반란의 불을 댕겼고 반란은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피첸토족, 베스티노족, 마루키노족, 파엘리노족, 마르시족, 프렌타노족등 8개 부족이 처음 반란을 시작하고 독자적인 수도를 정하고 정부를 만들었다. 나라이름을 "이탈리아"로 정하고 화폐도 만들었다. 이를 동맹시 전쟁이라고 부른다.     

동맹시 전쟁 와중에 로마는 로마에 우호적인 입장을 유지한 모든 이탈리아 지역에 시민권을 확대하는 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반란 세력을 축소시키고 삼니움족을 비롯한 몇 개 부족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승리를 거둔다. 동맹시 전쟁 동안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혁혁한 전과를 거두게 되고 동료로부터 풀잎관을 받는 영광을 누린다. 가이우스 마리우스 또한 동맹 시들에 대항하여 승승장구하지만 도중에 2번째 뇌졸중으로 병상에 몸져눕게 된다. 즉 마리우스는 석양으로 지는 해가 되는 것과 동시에 그의 동서(同壻) 술라의 시대가 개막됨을 의미한다.  

   

약 3년에 걸친 내란은 깊은 상흔을 남기는데, 이탈리아 전 국토가 황폐화되고 원로원 의원을 비롯한 전 시민들이 가난에 허덕이게 된다. 특히 원로원 의원들 상당수가 경제적 파탄에 빠져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것은 원로원 의원으로서의 경제적 지위를 요구하는 의원자격 유지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제 1 부 내용 참조).

이 점을 착안한 호민관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는 일정 금액 이상의 부채를 진 원로원 의원들을 축출하는 법안을 발의하여 통과시킨다. 이로 말미암아 원로원 의원 절반 이상이 떨어져 나간다. 이는 원로원 대 민회라는 힘의 균형이 전적으로 민회 쪽으로 기우러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와중에 아나톨리아 반도의 폰토스왕 미트리다테스는 내전에 빠진 로마의 허점을 이용하여 야심찬 행동을 개시한다. 로마의 속주들을 급습하고 체류하고 있는 모든 로마 병사와 로마인들을 무참히 살해하는데 그간 로마에 대하여 쌓였던 원한을 풀어내듯이 잔인한 방법으로 사그리 처형하는데 그 수가 10만 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아나톨리아 반도를 평정한 미트리다테스는 그리스와 마케도니아로 침공하여 로마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들을 하나씩 점령해가기 시작한다.  

로마의 역사상 최대 위기이자 실로 내우외환이 아닐 수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동맹시 전쟁이 어느 정도 수습의 단계에 있다는 것이었다.     

로마는 미트리다테스에 대항하고자 대책을 마련하지만, 동맹시 전쟁에서 명성을 드높인 술라와 로마의 일인자 마리우스 간에 미트리다테스 정벌을 위한 군사지휘권을 두고 치열한 경쟁이 시작된다. 대다수 의원들은 젊은 피 술라를 응원하지만, 일흔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마리우스는 6번의 집정관 경력과 수많은 자신의 피호민들을 무기로 총사령관직을 맡고자 한다. 뇌졸중에서 간신히 치유된 몸으로 비상식적인 욕심을 부린다. 일종의 노욕(老慾)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술피키우스는 끊임없는 개혁을 시도한다. 그는 로마 시민권을 획득한 이탈리아인들을 트리부스(일종의 선거구)에 골고루 배치하는 법안을 밀어붙인다. 이는 기존 기득권자들에게 신규 세력이 유입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를 좋아할 사람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신규 시민권자들을 일정 선거구에 가둬버리는 현 상황은 피로 쟁취한 시민권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것이었다.

이에 술피키우스는 마리우스와 야합을 하기로 한다. 즉 마리우스는 자신의 영향력으로 술피키우스의 트리부스 배분 문제에 협력하기로 하고 대신에 미트리다테스 정벌을 위한 총사령관 직을 받기로 한다.

     

결국 술피키우스와 마리우스의 야합은 성공적으로 결말이 나고, 원로원을 통한 로마의 정치체제를 희망하던 술라로서는 군 지휘권마저 마리우스에게로 넘어가자 동맹시 전쟁 동안 양성한 자신의 군대를 동원하여 로마로 진격한다. 로마법에 따르면 그 누구도 군사를 로마에 진입시켜서는 안 되고 공화정 400년 역사 동안 이 같은 철칙이 지켜져 오고 있었기에 술라의 군사 행동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술라는 술피키우스의 개혁안을 모두 무산시키고 그의 정적들을 모조리 살해한다. 이때 술피키우스는 피신 도중에 잡혀 죽음을 당하고 마리우스는 극적으로 도피하여 시칠리아와 아프리카까지 가는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민투르나이라는 시골 도시에서 마리우스는 자객들에게 잡히고 관가에 끌려가 죽음을 앞두게 되지만 민투르나이 시민들이 제3의 건국자를 죽일 수 없다며 떨쳐 일어나 그를 구한다.          

이때의 일화를 바탕으로 장 제르맹 트루에의 작품 “민투르나이의 마리우스”가 탄생하게 된다.      

술라는 정적들을 처리하고 원로원의 구성도 원상 복구하였다. 

그리고 군대를 정비하여 미트리다테스가 있는 그리스로 출병하기로 한다.

당시 군사를 일으켜 원정을 떠난다는 것은 전리품과 귀금속을 노획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에 모든 지휘관과 병사들은 두 손 들어 환영하는 일이었다. 마리우스와 비교하여 술라에게 있어 유일하게 부족한 것은 바로 자금이었다. 그는 미트리다테스를 정벌하고 동방의 왕실에 가득 쌓인 금괴를 약탈하고자 출병을 한다.

술라의 군사 쿠데타는 누구든 무력으로 집권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기게 되며, 간간이 폭력 사태는 있었지만 그간 포룸 로마눔에서 연설과 웅변으로써 자신의 정견발표와 변호를 해오던 정치인들에 익숙해진 민중들의 반응 또한 탐탁지 않았다.     


술라가 자리를 비운 동안 마리우스는 극적으로 회생하여 건강도 어느 정도 회복하게 되었다. 그리고 로마와 이탈리아에 있는 그의 수많은 피호민들과 지지 세력을 등에 업고 당당히 귀환하게 된다.

그는 탈영병, 퇴역병 그리고 해방 노예들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입성하였고 로마를 도륙하다시피 자행된 피의 숙청은 당시 마리우스의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음을 입증하였다. 그는 문자 그대로 복수의 화신이 되어 돌아온 것이었다. 아무튼 마리우스는 강압이든 뭐든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7번째 집정관에 당선이 된다. 그리고 술라를 지지했던 소위 원로원파를 대대적으로 처형한다. 집정관으로 선출된 13일째 마리우스는 3번째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그가 말년에 자행한 피의 숙청은 너무나 끔찍하였기에 그의 가족들과 측근들도 그의 죽음을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하였다. 


*P/S

1. 보호인(patronus)와  피호민(cliens)

로마 공화정 사회는 보호자와 피호민으로 구성되었다. 이는 가장 엄숙하고 도덕적인 구속력이 있는 방식으로, 피호민은 보호자의 이익을 도모하고 그의 지시에 따를 것을 약속하는 대신 여러가지 원조(일반적으로 돈이나 지위, 법률적인 도움)를 받았다. 어느 쪽이건 이 중요한 관계에서 불명예스럽게 처신하면 사회적인 성공은 기대할 수 없었다.     

2. 동료 시민

최근 정치권에 등장한 용어이다. 어원은 그리스 아테네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로마공화정에서 수시로 사용되던 말이었다. 수평적 관계에서 공화정의 최대 미덕인 공공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으며 더 깊은 이면에는 동맹시 전쟁처럼 피의 투쟁을 통한 동등한 권리 쟁취의 뜻도 담겨있다. 우리나라 현실에서 시민권의 개념이 매우 피상적이고 피부에 와 닿지 않는 바인데 무슨 의미에서 이런 용어가 등장한 것인지 여전히 의문이다. 좀 더 부연하자면, 미국의 여성 참정권은 1920년이고 흑인에 대한 선거권 확대는 1965년이다. 우리나라는 해방과 함께 유입된 민주공화정으로 법적 지위가 애초부터 아무런 차별 없이 동등하게 주어진 상황이었음에 fellow citizen이란 용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의아하다.     

3. 정복자 카이사르에 대한 언급이 필요하다.

카이사르는 조부 카이사르의 선견지명으로 시대를 주름잡는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큰 고모부로, 그리고 코르넬리우스 술라를 작은 고모부로 모시는 특별한 가정환경에서 성장하게 된다.

특히 마리우스 말년에 그가 요양 중일 때 카이사르는 그를 간병을 하고 말동무로서 함께 시간을 보낸다. 로마 일인자의 영웅적인 면모를 지근거리에서 보고 배운다.

허나, 마리우스는 죽기 전 카이사르의 특출함과 총명함을 알아보고 자신의 절대적 위업과 명성을 넘어설 인물로 판단한다. 노욕과 정신착란에 사로잡힌 마리우스는 어린 카이사르의 정치적 군사적 진로를 사전에 차단하고자 유피테르 대사제라는 종교지도자로 임명해버린다. 이때 그의 나이 13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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