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잎이 따뜻한 봄바람을 타고 달아났을 즈음 아이를 출산했다. 자연분만으로 아이를 낳고 싶어 긴 시간의 고통을 인내했지만, 아이가 움직이지 않아 결국 수술을 했다. 열 달을 품은 아이가 세상 밖으로 나온 지 5일이 지나니 찢어진 생살이 조금씩 아물었다. 출산의 고통보다 산후의 고통이 더욱 쓰렸지만, 아이를 만나려면 빨리 회복해야 했다.
“아파도 더 많이 움직이고 힘들어도 계속 걸으셔야 해요 그래야 빨리 회복이 됩니다”
담당 의사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나의 고통을 알 리가 없었다. 출산해보지 않은 남자 의사는 수십 년간 보아왔던 산모의 일그러진 얼굴, 퍼석해진 피부, 힘없는 목소리, 온전하지 않은 몸 상태를 보면서 출산의 고통을 짐작하였을 뿐 그들의 고통에 공감할 순 없었을 거다.
“열 달 동안 아이에게 눌려있던 장기들이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가느라 아픈 거예요. 1주일 후면 앉았다 일어나고, 걸어 다니는 게 지금보다 수월해질 거예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고통도 크구나’
고통스럽다고 툴툴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아이에게 젖을 물리려면 어떻게든 빨리 회복을 하는 게 중요했다. 내 발로 입원실 문을 열고 걸어가 아이가 있는 신생아실로 가기까지는 고작 1m였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지만 난 신생아실을 돌아갔다. 매일 30분씩 복도를 10바퀴씩 걸으며 굽어진 허리를 조금씩 펴는 연습을 했다. 고통은 점점 줄어들었다. 흩어져 있던 장기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과정에 익숙해진 건지, 내가 장기들의 움직임에 익숙해진 건지 모르겠지만 장기들과 내가 어느 시점에 합의를 본 듯 고통은 사라지고 있었다.
‘드디어 출산과 산후의 고통이 끝나가는구나!’
출산을 처음 했으니 그다음은 어떤 고통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알 턱이 없다. 그저 아이를 안을 생각에 겁도 없이 나는 본능적으로 젖을 물렸다. 그리고 젖몸살의 고통이 시작되었다. 하나의 고통이 끝나니 새로운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첫 고통에 비해 두 번째 고통은 조금 무뎌질 뿐이었다. 아이를 안아보겠다는 의지가 고통을 이기는 순간 내 몸에 밴 고통이 리셋됐다. 앞으로 마주하게 될 육아 고통은 상상도 못한 채 우리 셋은 한지붕 동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