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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수다 왕언니 May 31. 2023

낙인

[수레바퀴 아래서_헤르만 헤세 저_민음사] 를 읽고...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중간고사를 보고 난지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밤늦게까지 식당에서 일을 하셨던 엄마는 딸의 성적을 일일이 챙기기 힘들었다. 그런 틈새를 놓치지 않았던 나는 공부보다는 탈춤을 배우는 동아리활동에 매진하고 있었다. 남들은 공부하는 자율학습시간에 동아리방에서 탈춤을 배웠다. 그래서 입학할 때 등수를 유지하지 못하고, 성적이 곤두박질쳐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날 밤 결국 들통이 나버렸다.


 착실한 줄 알았던 딸의 일탈에 엄마는 크게 실망하셨다. 그래서 다음날 내가 나가지 못하게 밖에서 문을 잠그고, 혼자 학교에 가셨다. 담임선생님과 상담을 하시고, 동아리 선배들에게도 뭐라고 하셨다고 한다. 3일이 지나고 나서 자퇴서를 내기 위해 학교에 간 나는 그 사실을 동기에게 들었다. 나를 찾아다닌다는 선배들이 무서워서 자퇴서를 내고 도망치듯 학교를 나왔다. 그게 내가 그 시절 인문계 고등학교에 잠깐 다닌 기억이다.


 그 후 나는 자퇴생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동네 독서실에서 매일 소설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다음 해 3월 상업계 고등학교에 다시 입학했다. 그리고 졸업을 하면서 바로 직장인이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년쯤 지났을 때 동생이 수능을 보겠다고 선언을 했다. 산업체 전형으로 야간대학을 가겠다는 것이다. 나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엄마는 탐탁지 않은 말투로 말씀하셨다. 


"저 년이, 하랄 때는 안 하고 이제 와서 대학을 간다고..."


 낙인이었다. 하지만 꼬박꼬박 월급 타오는 성인 딸의 의사를 반대할 명분을 엄마는 갖지 못했다. 나는 회사에서 학력 때문에 차별을 받아 본 적이 없다. 나름 누구나 알만한 기업인데도 불구하고, 대졸 여직원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막상 사회에 나와보니 대학졸업장이 왜 필요한 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란, 불타는 의지 때문도 아니었다. 그냥 나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어릴 때부터 동생보다 공부를 곧잘 했다. 그래서 엄마의 기대주였다. 가난한 형편에도 인문계학교를 다녔던 이유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가서는 정작 부모가 원하는 길을 가지 않았던 것이다.

 

 '수레바퀴 아래서'의 주인공 한스도 어릴 때부터 공부에 재능이 있었다. 그래서 많은 어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열심히 공부해서 당당히 수도원에 합격했다. 문제는 한스가 반항아 하일너와 친구가 되면서 부터 시작한다. 이를 통해 문제아로 수도원 교장과 교사들, 동료 학생들에게 낙인이 찍힌다. 기성세대들의 기준과 잣대는 수레바퀴다. 그 아래서 한스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자살을 생각한다. 낙인이 한 어린 소년을 어떻게 파멸로 이끌 수 있는지 엿볼 수 있었다.


이제 기벤라트는 더 이상 학생들의 무리에 끼어들지 못했다. 그는 문둥병자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p.169 중에서...
 이렇듯 고통과 고독에 내맡겨진 병든 소년 한스에게 위로자의 가면을 쓴 또 다른 유령이 다가왔다. 그리고 점차 그와 친숙하게 되어 급기야는 자신과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것은 다름아닌 죽음에 대한 생각이었다. p.181 중에서...


 한스와 달리 내가 대학을 가기로 마음먹었을 때는 성인이었다. 나는 직장이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부모에게서 독립할 수 있는 돈이 있었다. 물론 자신감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부모의 낙인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실 낙인의 굴레를 어떻게 벗어나는가의 문제는 마음가짐에 달려있다. 한스가 좀 더 단단한 내면을 갖고 있었다면 그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까? 이 어린 소년을 믿고 지지해 주는 따뜻한 누군가가 있었더라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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