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_톨스토이 저_현대지성] 을 읽고...
여동생과 나는 같은 중. 고등학교를 다녔다. 일주일에 한 번 전교생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기독교 학교였다. 월요일 아침 조회시간에도 중간에 기도를 드린다. 졸업식, 입학식에도 기도와 축사는 빠지지 않았었다. 부활절은 가장 큰 행사였는데, 닭똥 냄새가 온 학교에 진동 할 정도였다. 그리고 성경과목이 있어서, 일주일에 한 시간씩 수업을 들었다. 이단과 사탄에 대한 내용이 제일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전도사님이 해주시는 지옥불에 떨어져 벌을 받는 이야기는 너무 생생해서 특히 더 무서웠다.
중학교 때는 학교 근처에 있는 큰 교회를 다녔다. 나는 그곳에서도 활발하고 적극적이었다. 지금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시절 교회에서 임원을 맡았었다고 예전에 동생이 말해 준 적이 있다. 복음주간에는 모두 통성기도를 하곤 했는데, 나는 방언을 하는 교인들이 무섭기도 하면서 부러웠다. 왜냐하면 그들의 특이한 몸짓과 소리가 더 신실한 믿음의 증거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믿음은 부족하구나!'라며 자책을 하기도 한 것 같다. 하지만 종교 생활은 중학교 졸업과 동시에 흐지부지 끝났다. 나와 달리 여동생은 아직도 하나님을 믿고, 믿지 않는 다른 가족들도 함께 구원받기를 기도한다.
톨스토이는 말년에 종교적 신념에 빠졌다. 자신의 재산을 기부하는 문제로 아내와 큰 불화를 겪었다고 한다. 그래서 집을 나와 방랑자 생활을 하다, 어느 기차역에서 죽음을 맞았다. 그는 불안한 러시아 정세의 원인을 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데서 기인한다고 생각했다. 요상한 승려, 라스푸틴에 빠진 황실과 귀족들,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교회를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배움이 약한 민중들이 신의 은총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우화 형식의 이야기들을 썼다. 그 단편들의 묶음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이다.
톨스토이는 주변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의 것을 나누라고 설파한다. 그래야 자신도 평화를 얻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인간이 선하다고 믿었던 것 같다. 과연 인간이 선할까? 17세기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과학자인 파스칼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란 얼마나 괴물 같은 존재인가! 이 얼마나 진기하고, 괴물 같고, 혼란스럽고, 모순되고, 천재적인 존재인가! 모든 것의 심판자이면서 하찮은 지렁이와 같고, 진리를 간직한 자이면서도 불확실함과 오류의 시궁창과 같고, 우주의 영광이면서도 우주의 쓰레기와 같다.
-블레즈 파스칼-
나는 종교적 이데올로기를 이해하기 힘들다. 신약은 기원후 써졌다지만, 구약성경은 기원전 1400년부터 이름 모를 저술가들에 의해 써졌다. 게다가 은유와 비유로 점철되어 있고, 폭력적인 이야기도 많다. 그래서 사람을 속이고 싶어 하는 인간들, 사이비 교주들이 인간을 세뇌하는 데 이용하는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인간이 선한다고 믿지 않는다. 무수한 폭력의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그렇기에 톨스토이가 말하는 신의 은총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2천 년 전에 쓰인 성경을 믿고 그 기준에 맞춰 자신을 삶을 끼워 맞춘다는 것이 비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많은 희생과 시간을 통해 지금의 평화를 얻었다. 특히 폭력적인 세상에서 약자일 수밖에 없었던 여성은 20세기 후반에 와서야 숨 쉴 수 있었다. 어제 KBS '세계는 지금'이라는 프로그램을 보았다. 현재 베네수엘라는 경제가 붕괴되어, 아이들이 거리에서 구걸을 하고 10대 소녀들도 매춘을 하고 있다고 한다. 국가의 힘이 약할수록 치안은 불안하고, 제일 고통받는 약자는 여성과 아이들이다. 도로에서 유리창을 닦아주며 돈을 버는 한 소년이 말하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배고파서 도와달라고 하지만 잘 도와주지 않아요. 누군가 착한 이가 도와주길 바랄 뿐이죠. 신이 도와주길 바랄 뿐입니다."
세상은 부조리하다고 믿는 나이지만, 가끔 이런 답답한 상황을 만날 때면 신의 존재를 믿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가난한 소년의 실낱같은 바람이 희망이 될 수 있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