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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수다 왕언니 Oct 10. 2023

무엇이 그를 지하로 숨게 했을까?

[지하로부터의 수기_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저_민음사]를 읽고...

 인간사회에서 스스로 격리된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자신의 도피처로 지하세계를 선택한다. 말이 지하세계지.. 좁은 지하방에 틀어박혀 홀로 20년이란 세월을 보낸다. 친척의 유산을 물려받아 일을 하지 않아도 먹고살 수 있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유산이 그의 도피를 도왔으니 말이다. 지하세계에서 그는 책을 읽는다. 책을 읽고 상상과 몽상을 하고, 과거의 기억을 재편집하며 시간을 보낸다. 관념에 사로잡힌 그에게 사회는 태양계가 아닌 은하 저편의 어딘가와 같은 느낌일 것이다.


 이 소설은 유명한 러시아의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이다. 죄와 벌을 쓰기 전 1864년에 발표한 200페이지의 짧은 소설이다. 19세기 작품으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파괴적이고 독특했다. 특히 1부 지하인간의 독백을 읽을 때 나는 정신이 몽롱했다. 의식의 흐름대로 쓰인 글들이 난해하고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중간중간 나오는 철학적 사유는 꽤 놀라웠다. 그나마 어지러운 독백의 분량이 많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나저나, 점잖은 사람이 가장 큰 만족감을 맛보며 얘기할 수 있는 주제는 과연 무엇일까? 대답인즉, 바로 자기 자신이다. p.13
맹세하건대, 여러분 너무 많이 의식하는 것이야말로 병, 그야말로 진짜 병이다. p.14
자연은 당신의 소망이 뭔지. 또 자연의 법칙이 당신의 마음에 드는지 어떤지는 관심도 없다. 당신은 자연을, 따라서 그것의 모든 결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p.24
내 생각으로 심지어, 인간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정의는 두 발로 걷는 배은망덕한 존재라는 것이다. p.49


 지하인간은 자신이 주변 누구보다 똑똑하게 태어난 것이 죄라고 말한다. 현실에도 나르시시스트들이 존재한다. 그러니 요즘 '관종'이라는 말이 유행하는 것이 아닐까? 나도 타인을 의식하면서 산다. 먼바다 한복판 무인도에서 혼자 살지 않는 이상, 집단속에 존재하는 인간에게는 당연하다. 그런데 지하인간은 지나치다. 조용히 살다가 의기양양하게 죽어가는 게 매력적이라고 말한다. 이 부분을 나는 동의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마냥 미워하기도 어렵다. 왜냐하면 첫 문장에서 자신은 아픈 인간이고, 심술궂고, 매력이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도통 극과 극을 오가는 이 남자, 깡마르고 왜소한 체격의 이 남자가 현실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 것 같은 생각마저 들게 한다.


'맙소사, 이것이 내가 어울릴 만한 집단이란 말인가!' 나는 생각했다. (중략) 물론 그러고서도 나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p.119


 중년이 되면서 불필요한 인간관계를 정리하는 게 쉬워졌다. 반면에 젊은 시절 사회생활을 할 때에는 달랐다. 지하인간처럼 속으로 불편한 것이 역력해도 사람들과 어쩔 수 없이 어울렸다. 돈과 시간을 낭비한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거절할 수 없었다. 지하인간은 나와 너무 다르다. 내 생각에는 도를 지나치는 행동처럼 보였다. 사이가 좋지 않은 동창생의 송별회에 다른 사람들이 눈치를 주는 데도 억지로 끼어든다. 모임의 분위기까지 흐리면서 말이다. 자존심도 없는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3시간 동안 방안을 서성이며 주목을 끌어보려고 왔다 갔다 한다. 파리가 윙윙대는 것처럼... 나는 이 부분에서 정말 깔깔거리고 웃었다. 고전소설을 읽으면서 이렇게 웃어보기는 처음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팬이 돼버렸다. 웃고 나니 지하인간이 마냥 밉지 만은 않았다.


 모순적이고 비 이성적인 지하인간을 동정하게 된다. 사실 내 모습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경험에서 깨우침을 얻기도 하지만, 젊을 때는 책에서 답을 찾으려고도 다. 하지만 지금은 책이 온전히 사실세계를 보여주지 않는다는 걸 안다. 그렇지만 성질 급한 나는 빨리 해답을 찾고 싶을 때가 종종 있다. 그래서 책을 읽고 사람들과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글을 쓰며 생각을 정리한다.


 지하인간처럼 극단을 달리지는 않지만 나이가 들수록 현실세계의 피곤함을 견디기 힘들 때가 많다. 그래서 가끔 상상한다. 어느 날 거액의 로또에 당첨되면 남태평양의 어느 아름다운 섬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는 상상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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