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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수다 왕언니 Nov 01. 2023

쫄면의 슬픔(아들의 메타포)

[네루다의 우편배달부_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저_민음사] 를 읽고...

"엄마, 쫄면 사 왔어?"

아들은 언제 들어왔는지, 중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며 물었다.


"당연히 사 왔지, 아들... 오이랑 콩나물 해놨는데, 넣을 거지?"

"아니, 콩나물은 쥐약이야. 양배추는? 양배추는 안 사 왔어."


"양배추는 양이 너무 많아서 안 사 왔지. 집에 양상추가 있어서..."

"아니, 양배추가 없다니.. 쫄면의 슬픔이야!"


중학교 2학년인 아들은 전형적인 이과형 남자다.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등장인물의 행동과 대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감수성 제로, 남편의 유전자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런데 은유와 비유는 곧잘 사용한다. 가끔 기발한 표현에 나는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의 주인공 마리오는 17세 소년이다. 작은 섬마을에 살고 있다. 주민 모두가 어부로 생계를 유지하는 곳이지만, 그는 아버지를 따라 물고기를 잡을 생각이 없다. 대신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가다 우연히 발견한 채용공고를 보고, 우편배달부가 된다. 고객은 단 한 명 칠레의 국민시인 네루다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대부분의 주민들에게 오는 편지는 없기 때문이다. 네루다에게 오는 팬레터를 배달하는 일이 마리오의 일이다. 이 일을 계기로 네루다의 시를 접하게 된 마리오는 메타포를 깨닫고 표현하기에 이른다. 마을 주점에서 일하는 베아트리스에게 첫눈에 반한 그는 네루다의 시로 그녀의 환심을 사고, 결국 결혼에 골인한다. 그렇게 점점 시는 그의 삶의 전부가 된다. 


칠레의 아픈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소설의 결말은 꽤 슬프다. 작가는 열린 결말로 남겼지만, 나는 피노체트 치하에서 많은 칠레 국민들이 탄압받았던 그들의 역사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결말이 희망적일 수 없었다. 하지만 소설은 무겁고 엄숙하지 않다. 시종일관 유머와 해학이 넘친다. 특히 성적 유희가 많아 나의 취향에 딱 맞았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면 결코 가볍지 않은 소설. 나는 로또에 당첨된 기분이 들었다. 우연히 알게 된 소설이 큰 감동을 줄 때는 나는 꼭 횡재한 기분이 든다.


마리오의 따분하고 지루한 일상에서 '시'는 평범한 삶을 바꿔놓았다. 중 고등학교 시절, 나는 시를 좋아한 문학소녀는 아니었다. 그러나 노래 가사는 시를 대체하기에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신승훈의 '보이지 않는 사랑'을 듣고, 공책에 받아 적으며 눈물을 흘렸으니 말이다. 지하철 벽에 붙어 있는 시 구절도 발걸음을 멈추고 읽어볼 정도의 낭만도 있었다.


나의 삶에 따뜻한 온기를 더한 문학은 소설이다. 인생책을 꼽아 달라는 질문을 받는 다면? 나는 어떤 소설을 정할 수 있을까? 안토니오 스카르파의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읽고 문득 이런 질문이 생각났다. 감수성 풍부했던 그 시절 내가 제일 좋아했던 책은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이다. 나이보다 성숙한 제제와 뽀르뚜까 아저씨의 우정과 사랑을 담고 있는 성장소설이다. 뽀르뚜까 아저씨가 죽고 나서 어린 제제의 슬픔은 나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여러 번 읽었는데, 읽을 때마다 나는 매번 소매로 눈물을 훔쳤으니 말이다. 그때 나는 인생은 마냥 행복하지 않은 거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랑하는 누군가와 만나게 되어도 영원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인생에서 체념해야 할 것들이 있다는 사실이 어린 마음에 스며들었다. 


가을이 끝자락을 향해 가고 있다. 알록달록 변한 나뭇잎들이 낙엽으로 떨어져 내릴 것임을 나는 안다. 이 계절에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만나 조금 더 행복했다. 이런 소설들을 앞으로 종종 만나게 될 터임이 분명하다. 다음에는 어떤 소설이 나의 인생의 한 단면을 채워줄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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