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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셜혜 Apr 20. 2023

느닷없이 우울증이 찾아왔다.

- 언젠가는 꼭 해야만 했던 이야기


  엄마가 돌아가셨다. 55년을 세상 속에서 씩씩하게 살다가 5개월 남짓을 병실에서 보낸 엄마는, 그렇게 땅으로 돌아갔다. 엄마가 암 판정을 받은 건 내가 고3 때. 별생각 없이 부모님을 따라 병원에 갔던 나와 동생은 엄마가 아픈 줄도 모르고 병원 TV를 보며 노닥거렸다. 서울에 엄마를 두고 아빠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조수석에 앉아 백미러에 비친 동생을 향해 웃긴 표정을 지으며 낄낄댔다.



  - 너네, 엄마가 암인 거 아냐?



  보다 못한 아빠가 화가 나서 쏘아붙인 말. 그 말을 듣자마자 우리는 얼어붙었고, 그때부터 차 안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언제 웃었냐는 듯 우린 각자 다른 풍경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엔진소리와 함께 이따금 훌쩍이는 소리만 들려왔다.




*




  이 기억은 엄마가 돌아가시기 7년 전, 지금으로부터는 약 12년 전의 일인데도 아직 생생하다. 엄마와 이별을 하고 벌써 3주기가 지났음에도, 엄마와의 행복하고 좋았던 때보다 아직 여물지 못한 그때의 기억들이 훨씬 선명하다. 임종을 앞둔 엄마의 손을 붙잡으며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일들을 후회하지 않겠다고, 행복하고 좋은 추억들만 꺼내보아도 시간이 모자라니 엄마에게 못 해준 것들은 구태여 들추지 않겠다고 말했다. 어쩌면 곧 작별할 엄마에게 조금 이기적으로 구는 건 아닐까 싶었지만 그게 자식이니까, 엄마는 이해해 줄 거야. 철부지처럼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대체 왜, 나는 여전히 후회로 가득할까. 처음 세상에 태어나 엄마와 만나고, 헤어질 때까지 수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왜 내게는 아픈 엄마의 모습만 떠오르는 걸까. 아마 이렇게 될 줄 알고 대답도 못 하는 엄마 앞에서 다짐했나 보다. 엄마와의 예쁜 기억들이 아니라 못해 준 일들만 잔뜩 떠오를 것 같아서. 반짝이던 엄마가 아니라 꺼져가는 촛불처럼 위태로운 모습만 남을 것 같아서.


  그렇게 엄마와의 이별이 가까워지기 시작할 즈음. 크리스마스 파티를 마지막으로, 엄마는 더 이상 집에 돌아올 수 없었다. 그 이후부터 엄마와 우리는 몇 번이나 구급차를 타야 했다. 처음에는 모질게도 엄마보다 엄마를 데리고 5층을 오르내려야 할 소방대원들을 더 걱정했다. 아파 죽겠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며 엄마가 서운함을 내비치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 이후에는 엄마의 통증이 점차 심해졌기에 아프다고 우는 엄마의 말을 들으며 내가 먼저 119를 불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나 감사하게도, 이 시기가 방학 기간이었다. 내가 교사라서 천만다행이었다. 본가와 직장이 2시간 거리라(그 당시엔 기차를 타고 다녀서 환승 시간까지 4시간 정도 걸렸다) 평소에 자주 오고 다니지 못하고 방학 때만 본가에 내려올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방학이라 별 제약이 없을 때는 본가에 있는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다가 학기가 시작되면서 엄마와 함께 내가 근무하는 지역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쯤 아예 본가 살림을 다 빼고 이사를 했다. 그때 당시엔 아빠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에 집 계약, 병원 입·퇴원 수속, 이사 등등을 내가 거의 주도적으로 해야 했다.


  이때부터 나는 점점 병이 들어갔던 것 같다. 아니, 사실 정확한 시기를 알 수는 없다. 그동안 우울이라는 걸 전혀 모른다 생각하고 살아왔지만, 씩씩해도 암 환자였던 엄마가 7년이나 내 옆에 있었으니까. 아마 내 안의 불안과 우울은 오래전부터 자리를 잡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내가 처음으로 '우울'이라는 감정을 인지했을 때는 이미 스스로 '아, 나 정말 위험하다'고 느꼈을 때였다. 그렇게 밝고 멋졌던 엄마가 나를 알아보기는 하는 건지 제발 살려달라며, 약 좀 달라며 소리치는 모습에 점차 곪아갔다.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마약성 진통제를 계속 투약받길 원하는 엄마와, 혹시나 거기에 중독될까 무서웠던 나. 병원에서 우리는 평소보다 꽤 자주 싸웠다.


  그날도 그랬다. 엄마는 걱정되어 미치겠는데 해줄 수 있는 건 없고, 그런 엄마와 싸웠고. 누구보다 힘든 게 엄마인 걸 알면서도 변해버린 엄마의 모습에 지쳤던 나는 바람을 쐬러 병실을 나갔다. 1층에서 머리를 식히고 다시 병실로 올라가던 와중, 문득 계단 아래가 눈에 띄었다. 평소 고소공포증이 심해 의자에도 잘 올라가지 못했었는데 그때는 뭐에 홀린 건지 계단 난간을 잡고 고개를 쭉 뺐다.



 '아, 이대로 떨어지고 싶다.'



  그 말은 곧 죽고 싶다는 말이었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그대로 주저앉아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펑펑 울었다. 장난이라도 '죽고 싶다', '죽을 것 같다'는 말을 싫어했던 내가 죽고 싶다고 생각하다니. 나 진짜 낭떠러지 끝에 서있구나, 실감이 나서.




*




  그때부터 나는 늘 위기였다. 태연한 척, 괜찮은 척 가면을 쓰고 살아갔지만 잠시뿐이었다. 아이들이 집에 돌아가면 너무나 지쳐 울음을 쏟아내고, 퇴근하면 병원에 가서 엄마를 만났다. 매일 엄마에게 간 건 아니었다. 엄마도 엄마지만 나도 살고 봐야 했기에 매일 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홀로 24시간을 보내야 할 엄마를 애써 외면하며, 잠시나마 잊어보려 발버둥 쳤다.


  가슴 속에 무언가가 맺히기 시작한 날. 숨쉬기가 불편한 갑갑함을 느끼게 되면서부터 나는 주먹으로 내 가슴을 쾅쾅 내리치는 버릇이 생겼다. 누가 보면 놀랄까 남들 앞에선 치지도 못했다. 학교에서도 작은 갑갑증이 일어나면 아이들을 잠시 맡기고 화장실에 달려갔다. 가슴을 치고 나오려고. 어느 날은 도무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가슴을 마구 내려치다가, 이런 내가 너무 미친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울고 싶은데 울음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분명 울고 있는데 눈물은 나오지 않았고, 내 목에선 쇳소리만 새어 나왔다. 이대로 밖으로 뛰쳐나갈까, 잠깐이지만 진지하게 생각했다. 차오르는 건 도로로 뛰쳐나가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야 편안해질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런 생각을 애써 가라앉히고 침대에 누우니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누운 곳이 침대가 아니라 끝을 알 수 없는 구덩이 내지는 블랙홀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숨을 어떻게 쉬어야 하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단순히 심리적인 느낌이 아니라, 내 망상이 아니라, 말 그대로 정말 죽을 것 같았다. 그게 너무 무서워 곧바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직전까지 죽고 싶었음에도 죽을 것 같아 두려워지다니 아이러니했다.


  내가 전화를 건 친구는 극심한 우울증으로 고생을 한 적이 있는 친구였다.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우울증이 심해져서 일을 그만두고 치료에 전념했던 친구라 가장 먼저 도움을 요청했다. 나의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 수 있는 친구는 침착하게 통화를 하며 내 호흡을 도왔다. 호흡이 정상적으로 돌아오며 숨을 고르고 있는 내게 친구는 말했다.



   - 우리, 병원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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