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라는 곳
- 병원진료 vs 상담치료 | 나에게 맞는 치료 방법 찾기
정신과(정확히는 정신건강의학과)는 낯설지 않았다. 특별히 거부감도 없었다. 단지 내가 평생 갈 일이 없는 곳이라 생각했을 뿐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오만하다. 하지만 그때는 아직 어렸고 세상 물정을 잘 몰랐다. 공감하는 것만큼은 자신 있던 내가, 도무지 '우울'이라는 감정에는 깊이 있게 공감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지했으니까. 그런 내가 정신과에 찾아갔다. 이유는 절박했다. 살고 싶어서.
과호흡인지 호흡곤란인지, 그 무언가를 경험하며 이러다 진짜 죽겠다 싶었던 그날. 나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해는 떴고, 곧이어 출근을 해야 했다. 도보 10분 과장을 조금 보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 그 짧은 출근길이 갓 깔아놓은 아스팔트 길을 걷는 것 같았다. 발걸음을 뗄 때마다 '출근하기 싫다'가 아니라 '내가 출근해도 되나'라는 물음표가 가득했다. 학교에서 또 어젯밤처럼 호흡곤란이 오면 어쩌지. 아이들에게 대체 뭘 가르쳐줘야 하지. 동료 선생님들에게는? 학부모님들에게는? 꼬리를 물고 물음이 이어졌다.
학교에 출근하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애썼다. 티를 내지 않으려고,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럼에도 결국 나는 끝까지 버틸 수 없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고 편하게 할 수 있는 그림책 수업이었다. 평상시라면 아이들에게 목소리를 바꿔가며 실감 나게 읽어주었을 텐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내 감정을 묻어 두고, 아무렇지 않은 듯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다가 속이 너무나 메스꺼워져 책장을 넘기지 못했다. 몇 번의 헛구역질 끝에 결국 책을 덮었다. 감정의 괴리감이 너무 큰 탓이었다. 끝내 나는 아이들에게 책을 다 읽어줄 수 없었다.
티 내고 싶지 않았는데. 아이들에게 웃는 모습만 보여 주고, 좋은 영향만 주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는데. 이유가 어찌 됐든 내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쓰렸다. 그러면서도 내가 이만큼 힘들어도 아이들 앞에서는 가면을 쓰고 밝은 모습을 내보여야 한다는 사실에 속이 상했다. 괜히 연예인이나 교사 같은 직종이 마음의 병을 쉽게 얻는 게 아니다 싶었다.
도무지 수업을 어떻게 마쳤는지, 아이들을 어떻게 하교시켰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신없이 아이들을 모두 보내고 곧장 교무실로 향했다. 마음을 갈무리하고 침착하게 내 상태를 설명드려야지, 그리고 조퇴를 달아야겠다. 어떤 병원에 가야 할지 모르겠지만 대충 가장 가까운 데로 가면 되겠지. 다시 갑갑증이 일어나는 가슴께를 애써 달래며 교무실 문을 열었다.
- 무슨 일 있어? 괜찮은 거야?
교감 선생님이 내 얼굴을 보시곤 놀라서 물으셨다. 그 순간, 구멍 난 독을 애써 막고 있던 손바닥을 치운 것처럼 눈물이 흘러넘쳤다.
- 교감 선생님. 제가, 너무, 이상해요. 도저히, 학교에 있을 수, 가, 없어요.
히끅대며 두서없이 말했다. 그 당시 교무실에 누가, 얼마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로지 그 순간에는 교감 선생님만 보였다. 교감 선생님께 내 이야기를 꺼내놓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상담을 오래 배우셨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인지도 몰랐다. 교감 선생님은 잔뜩 흩어진 내 말들을 한 데 모아 정리하셨다. 그리고 나처럼 마음의 병이 생긴 사람들을 위한 프로그램과 병원을 추천해 주셨다. 교감 선생님과 짧지만 긴 이야기를 나누고 곧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
병원에 간 나는 간단하게 접수를 마치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처음 만난 의사 선생님은 좋게 말하면 이지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내가 평상시에 자주 만나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부류의 스타일이었기에 조금 긴장이 되었다. 의사 선생님은 어떻게 오게 됐는지, 요즘 감정 상태는 어떤지 차분히 질문하셨다. 보통 병원에 가면 5분도 안 돼서 진료를 보고 약만 타가는 게 부지기수인데, 여기선 거의 1시간 가까이 진료를 봤다. 어떤 부분은 두리뭉실하게, 또 어떤 부분은 집요하게 물어보셨다. 그러면 나는 평소에 말이 많은 사람답게 묻지 않았던 말까지 주절거렸다. 때로는 덤덤하게, 때로는 얼굴이 푹 젖을 정도로 오열을 하며.
엄마가 아프세요. 우리를 두고 갈 엄마가 걱정돼요. 저보다 어린 나이에 엄마를 떠나보낼 동생이 걱정돼요. 아내를 잃어버릴 아빠도요. 딸을 둘이나 먼저 보내게 될 할머니도 그렇고요. 저희 집 고양이도, 삼촌도……,
얘기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얘기를 하다 보니 그동안 내가 미처 꺼내놓지 못했던 것들이 참 많았다. 원래 나는 다른 사람에게 내 감정이나 생각을 얘기하는 게 어려운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 마음이 너무 그늘지고 온통 불안과 걱정으로 가득 차 섣불리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힘들 텐데 나까지 힘들게 할 필요 없잖아. 엄마와 죽음이라니, 너무 무거운 이야기라 다들 답하기 어려울 거야. 말할 용기가 없어 혼자 타인의 감정을 추측했다. 누구 하나 아무도 건넨 적 없는 짐만 잔뜩 짊어지고 있었다. 그제야 느껴졌다.
*
선생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마치고 어느 정도 진정이 되고 나니 궁금한 게 생겼다.
- 선생님. 전 우울증 검사 같은 거 안 하나요?
사실 해보고 싶었다. 수치로 내 마음의 병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의사 선생님은 단호하게 할 필요 없다고 하셨다. 너무나도 명백히 우울증이므로, 이런 경우에는 굳이 검사를 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조금 아쉽긴 했지만 두 번 묻지는 않았다.
진료의 마지막 화두는 앞으로 진료를 어떤 방식으로 진행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약을 먹을 것이냐, 아니면 오늘처럼 상담진료를 할 것이냐. 약을 먹으면 효과는 분명히 빠르겠지만 어느 정도의 의존도가 생길 수 있고(어리니까 쉽게 약을 권하지 않는다고 했다), 상담진료는 의존도에서 자유로우나 효과가 더디다고 했다. 얘기를 듣는 내내 점차 심장이 뛰었다.
'진짜 힘들어 죽겠는데, 저 보고 또 선택을 하라구요? 도저히 아무것도 못하겠어요. 그래서 왔는데 왜 저보고 고르라고 하세요. 그건 의사 선생님의 몫이잖아요!'
실제로 의사 선생님에게 몇 번이나 말했다. 저 못 고르겠어요. 모르겠어요. 너무 힘들어서 빨리 낫고 싶은데 약이 조금 무섭기도 하고요, 그렇다고 약을 안 먹기엔 제가 그전에 어떻게 될 것 같아서 두려워요. 그럼에도 결국 선택은 내가 해야 했다. 짜증도 났고 원망도 생겼다. 편해지려고 온 병원인데 선택이라는 돌덩이를 또 얹어주니까. 마음을 회복한 상태의 나는 이 선택이 뭐가 그리 무겁고 힘들었나 싶기도 하지만, 그때는 그랬다.
오랜 고민 끝에 선택한 것은 약물치료였다. 의존도에 대한 경계심은 분명히 있었으나, 아무래도 효과가 즉시 나타나지 않는다는 상담치료는 너무 막막했기 때문이었다. 의사 선생님은 우선 5일 치만 먹어보자며 처방을 해주었다. 처음 타 본 정신과 약은 신기했다. 이 작은 알약들이 내 머릿속 오물 같은 덩어리들을, 가슴속 무거운 바윗돌들을 사라지게 만들 수 있다니 믿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많이 다녔던 약국이고, 흔해 빠진 약 봉투인데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의사 선생님과 나눴던 이야기들을 찬찬히 생각해 보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마치고 후련했는가? 아니었다. 아직 남은 얘깃거리가 무수히 많았다. 조금이라도 나아졌는가? 그건 애매했다. 한 번의 진료로 나아졌다고 하기엔 내 삶으로 박혀 들어온 우울증이 너무나 견고하고 깊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내가 나아질 수도 있겠다- 는 아주 작은 실마리를 발견한 것이었다. 아직은 후련하지도, 나아진 것 같지도 않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나에겐 '다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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