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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카롱 Jun 11. 2024

까칠한 그녀

"알아서 뭐 하게?"

아무도 마주치지 않은 채 집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장보기나 병원을 다녀올 때, 아주 간혹 은행을 다녀올 때 내가 가장 먼저 염려하는 것은 이웃과의 대면이다. 닫힌 엘리베이터 안에서 말을 섞는 것은 나이 든 내가 가장 질색하는 일이다.


10도 정도의 경사로 20여 미터 오르막에 있는 107동 아파트까지 오르기에는 걸음이 느려지고 숨이 차올랐다. 양손에 쥐고 있는 장바구니가 어깨를 잡아당기고 발바닥엔 접착제가 발려진 것처럼 발을 떼기가 힘겨워 여러 차례 숨을 고르며 엘리베이터 앞에 이르렀다. 앞뒤로 아무도 없으니 다행이다 싶었다. 현관에 키를 대는 순간 유리문 안쪽 우편함 앞에 서 있는 이웃여자가 보이기 전까지. 이웃여자는 우편물 여러 개를 들고 하나하나 살피는 중이었다. 문이 드르륵 열리자 몸을 약간 틀어 목례를 하는 여자에게서 익숙한 향수 냄새가 풍겨왔다.


"안녕하세요?"

나는 고개를 까딱했지만 인사말은 하지 않았다. 아무도 마주치고 싶지 않은 바람은 깨져버린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이웃여자가 내 행색을 힐끗거리는 게 느껴졌다. 


귀찮은 것!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타자마자 층수를 누를 만반의 준비를 하며 발을 들여놓았다.

몇 층이시더라?' 혼잣말을 하며 이웃여자가 이어 물었다.

"몇 층이세요?"

나는 대답대신 손가락의 움직임을 천천히 보여주었다. 

"아하! 벌써 누르신걸....." 그제야 눈치챈 여자가 웃음을 흘리며 "맞다. 8층이셨죠." 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 말엔 앞으론 기억할게요라는 의미가 실린 듯도 했다. 팔이 뻐근해왔다. 봉지를 든 손을 치켜들어 층수 버튼을 눌렀기 때문이다. 허리춤에 있는 층수안내 쪽은 그녀가 가로막아 반대편 가슴높이의 버튼을 눌러야만 했다.



잠깐 머뭇거리던 여자가 내게 물었다.

"올해 어떻게 되셨어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거추장스러운 봄 가디건 안으로 진땀이 흐르고 있는데 네 까짓게 나이는 왜 묻는 건가 싶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벌서 수년째 반복되는 일이다. 

여자가 한 층이 더 오른 사이 그 어색함을 깨고 싶은지 자신의 어머니를 들먹였다.

"저희 어머니 연세가 올해 여든 넷이세요."


그래서? 그즈음으로 보인다는 거냐? 숨을 들이키며 속으로 되물었다.


어느새 6층이 지나고 있었다. 망설이다 마지못해 대답했다.

"하나 더 먹었수."

짧고 어색한 공기 속에 내 말이 더는 말하지 말라고 느껴졌는지 또는 그나마 답을 해서 다행인지 반색한 여자의 말이 연극적 톤으로 높아졌다.

"아! 그러시구나." 그녀의 들뜬 톤에 실린 '그러시구나'엔 '어쩐지, 힘들어 보이세요.'라는 말이 숨겨져 있다.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셨어요? 에 실린 사람들의 인사를 나는 싫어한다. 

내 굼뜬 몸가짐과 잔주름과 검버섯을 살피며 묻는 여자에게 속으로 뇌깔인 말은 단 하나였다.


알아서 뭐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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