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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sy sun May 02. 2023

혜원이와 나의 배추된장국

여자의 아침

혜원이와 나의 배추된장국

<오늘의 조식, 배추된장국>

멸치다시에 시골된장 크게 한 수저 넣고 팔팔 끓이다

알배추 숭덩숭덩 썰어 넣고 한소끔.

양파, 청양고추는 옵션.




나를 배신하지 않는 음식, 배추된장국.

영화 <리틀포레스트>의 주인공 혜원은 편의점 도시락을 삼키지 못하고 뱉어버린다. 그녀의 삶이 쉬어버려서. 그 길로 고향에 돌아간 혜원은 겨울 눈 속에서 살아남은 배춧잎을 뜯어 배추된장국을 끓인다. 그제야 편해진 속에 그녀의 삶이 안정된다.


혜원에게 그랬듯, 배추된장국은 나 역시 배신하지 않는다. 시장에서 산 시골 된장 한 숟갈에 배추만 넣어 푹 끓였을 뿐인데 혼잡스러웠던 내 속은 항상 편해진다. 배추된장국 한 그릇에 밥을 후루룩 말아먹고 있자면, 그냥 이대로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단순하다.

적어도 내가 보는 나 자신은 그렇다. 깊게 생각하지 않고, 깊게 가라앉지 않는다. "어떻게든 되겠지"를 삶의 모토로 삼는다. 흘러가는 대로 그 안에서 표류하는 것이 나의 특기다.


태어난 천성 자체가 그렇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흘러간 시간들이 쌓여왔다.

6년째 참석하는 독서 모임 (어느 순간 모임장이 되었다.)

10년 넘게 재직 중인 나의 "첫" 회사 (지금은 원장이 되어 버렸다.)

고등학생 때 친구로 만나 7년 차에 접어드는 남친 (그 남친은 남편이 되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좋아한 가수 god (엄마돈으로 가던 콘서트를 내돈내산하며 매번 올콘 중이다.)


주변 사람들은 이러한 나의 표면적인 상황을 보고는 "끈기" 혹은 "의리"와 같은 멋들어진 단어를 들어 나를 수식해주기도 하지만, 그 "끈기 있던" 시간들이 사실 단순한 시간의 흐름이었을 수도.




정말 이렇게 끈기 있어도 되는 걸까.

누군가 나에게 "너 지금 그 회사에 들어가면, 앞으로 10년 넘게 다니게 될 거야."라고 미래를 알려줬다면, 내가 그 미래를 선택했을까? 흘러간 내 시간들이 나의 끈기를 먹이로 삼고 커온 것이 맞을까?


시간은 흐른다. 나의 시간도 흐른다.

끈기 혹은 우유부단. 만 서른이 넘어 늦은 사춘기를 겪고 있는 나에게 끈기라는 단어는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오히려, 변화하는 세상에 발맞추지 않는 "우유부단"이라는 흠으로 각인된다.


이게 맞는 건가라는 물음표에 끊임없이 고통받는다.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정답이 있다면 쉬웠을 것을. <리틀 포레스트>의 배추된장국에 정착하고 싶다가도, 높은 건물 꼭대기에서 발아래를 바라보며 먹는 "조금씩 많이" 나오는 음식을 동경한다. 하지만, 둘 중 그 어느 것도 확실히 선택하지 않고 그저 흘러간다.


내가 칭찬으로 들어왔던 끈기 있다는 나의 장점이 진정한 끈기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늦은 사춘기를 지나며 깨닫는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해 온 것들이 최선은 아니더라도 차선쯤은 되길. 그저 어느 먼 훗날 후회보단 만족이 더 많았다고 자평할 수 있길.



끈기와 우유부단, 그 사이 어디에선가


"어떻게든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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