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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sy sun May 23. 2023

할아버지와 나, 스팸

아침 먹는 여자

내가 모르는 할아버지의 스팸

<오늘의 조식, 스팸두부조림>




따끈한 밥에 스팸 한 조각

어린 시절부터 스팸은 나의 밥반찬이었다. 설, 추석 명절이면 집에 들어오시는 부모님의 손에 스팸 선물 세트가 들려있는지를 먼저 확인했다. 초딩 입맛인 나에게는 값비싼 굴비세트보다, 몸에 좋은 홍삼세트보다 스팸 세트가 넘버원이었다. 방금 만든 흰 쌀 밥에 노릇노릇 구운 스팸을 얹으면, 몇 그릇이라도 먹을 수 있다.


부대찌개는 또 어떤가?

스팸을 비롯한 갖가지 햄과 두부, 떡, 라면 넣고, 김치 혹은 다른 채소들과 함께 얼큰하게 끓여준다. 어린 친구들에게는 후루룩 밥을 말아먹을 수 있는 맛있는 밥반찬 찌개. 사회에 지친 어른이들에게는 퇴근 후 술 한 잔 기울일 수 있는 술안주가 된다.





할아버지와 나

나는 어린 시절부터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부모님께서는 외갓집에 신혼살림을 차리셨고, 멀지 않은 시간이 지나 태어난 나 역시 자연스럽게 태어나자마자 6~7년을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한 지붕 가족으로 살았다.


함께 사업을 하시던 부모님이 워낙 바쁘시다 보니 당연히도 나의 첫 "친구"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되었다. 첫 손녀인 내가 당신들 눈에는 퍽 예쁘고 사랑스러우셨었나 보다. 나는 그들의 모든 생활과 취미를 함께 했고, 그 속에서 체득한 그들의 DNA는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민화투, 막걸리, 전통시장. 나의 "늙은이" 취향의 9할은 그들의 영향이다.


20여 년쯤 전, 외할머니는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 차사고였다. 하루아침에 홀애비가 된 우리 외할아버지는 우리 집으로 다시 살림을 합치셨다. 그리고 나의 초등학교 고학년, 중학교까지 함께 한 집에서 두 번째 동거 생활을 했다. 한창 10대였던 시기, 친구들과의 시간, 학교에서의 시간이 더 많았던 나였다. 그래서 그런지, 미취학 아동일 때 외할아버지와의 추억은 너무도 생생히 기억이 나지만, 이 즈음 그의 모습은 잘 기억나질 않는다.



할아버지와 스팸

한량, 꿀팔자, 35년 생 중 제일 멋쟁이. 내가 우리 할아버지에게 붙여 드린 별명들이다. "내가 알기론" 많은 일을 하지는 않으셨던 할아버지, 예쁜 것과 맛있는 것, 노는 것을 좋아하시는 할아버지. 지금은 나의 막걸리 친구인 할아버지. 매주 찾아가 함께 한 끼 정도 식사를 하고, 이제 돈을 버는 손녀가 보내 주는 여행을 몇 번 다닌 할아버지도 당신의 말년 팔자가 제일 좋다며 자랑을 하신다. 그러면 나는 일은 내가 하고 돈은 할아버지가 쓴다며 "한량"이라고 응수한다. 이런 손녀의 농담을 껄껄 큰 웃음소리를 내며 넘어가시는 그다.


하루는 할아버지와 점심 뭐 먹지 고민을 하다가 부대찌개집을 모시고 갔다. 나름 지역에서 맛집이라고 하는 부대찌개집이었는데, "맛있고, 신기하고, 자랑할만한 것"들이 취향인 우리 할아버지 입맛에 딱일 거라 생각했다.


"할아버지, 여기 맛집이래. 복지관 가서 자랑하슈~"


하는 내 말에, 할아버지는 기분 좋게 웃으며 음식이 나오기를 목 빠지게 주변을 구경하며 기다리셨다.


온갖 종류의 햄, 김치, 베이크드빈 그리고 그 위에 살포시 올라가 있는 스팸으로 만들어진 부대찌개 한 냄비가 준비되었다. 눈을 반짝반짝하며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시던 할아버지의 눈이 달라졌다.


"난 이 깡통햄 들어간 거 안 먹는다."


내 생전 처음으로 할아버지에게 들어본 "안 먹는다"였다. 이거 맛있는 음식이라며, 그래도 좀 드셔보시라는 내 권유도 마다하시고 할아버지는 밑반찬에 막걸리로 끼니를 때우셨다.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자, 할아버지는 푸념 섞인 그의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1935년 생으로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1950년 6.25 전쟁을 겪었던 그였다. "내 외할아버지"로만 알고 있던 그는 사실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직접 몸으로 부딪혀 지내온 사람이다. 6.25 전쟁 당시, 장남이던 할아버지는 먼 길을 매일 같이 걸으며 동생들을 먹일 음식을 조달했다고 한다. 당신이 당신 동생들과는 다르게 키가 작은 이유가 그때 무거운 짐을 하도 들고 다녀서라고 핑계 아닌 핑계를 대셨다. 풍족하지 않던 그 시절, 동생들을 먹이려면 "뭐가 됐든" 먹을 수밖에 없었단다. 그래서, 그는 미군 부대에서 먹고 남은 잔반이라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아, 그에게 부대찌개는 "미군들이 먹고 남은 깡통햄으로 만든 쓰레기 음식"이다.




꼰대 노인

"세월이 변해서 이런 쓰레기 음식을 돈을 주고 사 먹는다"


나는 그의 이 말이 잊히지가 않는다. 나의 "꿀팔자 할아버지"가 내가 모르는 시기의 삶을 살아낸 사람이었다는 걸. 나는 그때의 그를 알지 못한다는 걸.


맞다. 그의 말처럼 세월이 변했다. 젊은 우리들 눈에 그들이 답답할 수 있다. 왜 세상이 변했는데도 변하지 않는 건지. 왜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건지.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모른다. 그들이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100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천지개벽할 변화를 겪은 이 대한민국에서 "천지개벽"에 적응할 여유도 없었을 그였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매주 그와 티격태격 싸워가면서도 나의 한량 할아버지를 만난다. 그가 답답해도, 이해가 안 돼도. 나는 그를 모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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