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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리스 한 May 28. 2023

견딜 수 없이 촌스러운 ‘나’

북 에세이 2

 

       

 “나라고 말하거나 생각할 때, 대개 그것은 당신이 아니라 마음이 만든 그 구조물의 일부, 즉 에고의 지배를 받는 자아이다.”

에크하르트 톨레 (Eckhart Tolle)     




* ‘나’는 견딜 수 없이 촌스럽다

요즘 MBTI로 ‘나’를 소개하거나 표현하려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물론 나도 Z세대인 딸아이 덕분에 MBTI를 체크해 보았고 ‘나’를 소개할 때 종종 써먹곤 한다. 나름 흥미로웠다. “나는 0000라 사람 많은 곳은 피곤하고 조용한 곳을 혼자 산책하는 것을 좋아해.” 뭐 대충 이렇게 ‘나’를 한 문장 안에 구겨 넣는다. 그렇게 말하고 나면 정말 알파벳 4글자가 ‘나’를 온전히 대표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저것이 실제로 ‘나’인가?  

최근 정기적으로 모이는 독서 모임에서 누군가가 영어 subject 주어, 종속된이란 의미를 가진다고 말한 적이 있다. ‘I’란 단어 ‘나’라는 주어는 주체를 표시하는 것이라 볼 수 있지만 뒤집어보면 ‘나’라는 주체에 종속된 ‘나’가 존재함을 의미한다. 주체와 종속을 동시에 의미하는 ‘I’..............‘나’

‘나’가 선명한 가치관과 주체성을 가진다는 것은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단단한 바닥을 다져둔 것이나 다름없다. 내면의 바닥이 강하다면 외부의 고난이나 도전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든든한 밑천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열등하고 부정적 산물들, 결핍을 발생시키는 욕망 또한 ‘나’의 일부를 구성할 수 있기에 ‘나’를 이루는 가치와 생각의 흐름들이 모두 옳을 수는 없다. 정리해 보면 내가 누군지 명확히 알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흔들림 없는 '나'라는 정체성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지만 뒤집어보면 허구적 산물이자 검증되지 않은 완고한 주체에 사로잡혀 있다는 말과도 같다.

한 번은  친구와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도중에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로 이야기가 흘렀다. 그녀와 나의 입장이 달라 의견이 부딪힌 기억이 난다. 물론 둘 다 어느 정도의 인간적 품위는 지키는 선에서 서로의 입장을 마무리했다.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냥 그 친구의 입장과 의견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 줄 수 없었나? 그게 뭐라고 소중한 친구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 가면서 내 주장이 맞다고 우겼는지 싶었다. 그게 없어도 ‘나’인 것을..... 평소 인간적 겸손함과 유연함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나였는데 오만하고 경직된 ‘나’가 불 쑥 튀어나오는 통에 당황스러웠고 너보다 내가 옳다는 것, ‘나’의 우월함을 증명하기 위한 ‘나’의 태도에 부끄러웠다.

왜 그랬을까? 그건 ‘나’라는 사람이 가지는 생각과 가치가 ‘나’를 대표한다고 생각하기에 확고한 신념을 타인에게 부정당하는 것은 ‘나’를 부정하는 것이라 여겼는지 모른다. 어찌 보면 허구적인 ‘나’를 증명하려다 허구임이 들통난 것이다. 그렇게 내가 옳다고 여기고 나와 동일하다고 생각되는 외부적 요소나 내면의 정신적 가치와 생각들이 고집스런 ‘나’를  구성하게 되면 다른 생각이나 사고들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나도 모르게 만들어진 생각의 틀에 갇힌 ‘나’. 그것들이 건강한 ‘나’ 일 순 없다. 그렇게 ‘나’를 형성하는 가치관과 사고의 틀은 ‘나’를 편협하고 촌스럽게 한다. 이런 ‘나’에게서 해방될 순 없을까?   

  

   *‘나’는 갇혀있다

문득 작년 여름에 방영한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가 생각난다. 주인공 염미정은 사랑하던 남자 친구에게 돈을 사기당하고 그가 전 연인에게 돌아간 것을 안다. 가족에게 조차 말하지 못하는 사정을 아버지의 일을 도와주는 구 씨에게 들키고 만다. 염미정은 내성적이며 책임감이 강하고 자신이 상처받았음에도 타인에게 상처 주지 못하다. 가족들에게도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농사일에 지친 부모님을 성실히 돕는 착하고 희생적인 인물이다. 직장에서도 누구나 하나씩 가입 가능한 동아리를 선택하는 것도 자존감이 낮은 그녀에겐 너무 어려운 과제이다. 동료들과의 회식에서도 집이 멀어 막차를 타려면 언제나 먼저 일어나야 했기에 그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한다.

 염미정은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연인과의 관계에서도 온전하고 충만한 ‘나’를 느껴 본 적은 없다. 그녀는 타인에게서 아낌없는 사랑을 받아본 적도 그녀조차도 미움 없이 좋아만 할 수 있는 타인을 만난 적이 없다. 그녀는 현실의 ‘나’라는 자신을 구성하는 것으로부터 심한 압박과 고통을 느낀다. 때론 사랑하는 가족 또한 나를 숨 막히게 하고 불편하게 한다. 부모의 걱정을 덜어주고 도움이 돼야 했지만 진작 자신의 어려움을 말할 수 없었고 직장에서 온전히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싶지만 그 조차도 만만치 않다. 오히려 직장은 능력보다 사람 간의 사교적 기술과 친분으로 평가되어 네 편 내 편을 가르는 정치적 공간이 되기 일 수였다.

 사실 우리는 물리적 감옥에 갇힌 것은 아니지만 현실을 살면서 무언가에 쫓기듯 어디에 묶인 듯한 답답함을 느끼곤 한다. 매일의 일상들과 해야 할 일들에 치여서 살아간다. 여행이나 유흥, 여가는 시간적, 경제적 여건도 조성되어야 하지만 현실이 주는 압박을 모두 제거하는데 한계가 있다. 진심 숨통을 튀어주는 공간을 찾는 것은 어렵다.     

 

“초등학교 1학년 때 20점을 받은 적이 있었어요. 시험지에 부모님 사인을 받아 가야 했는데, 꺼내진 못하고 시험지가 든 가방만 보면 마음이 돌덩이처럼 무거웠어요. 사인은 받아야 하는데 보여 주면 안 되는, 해결은 해야 되는데 엄두가 나질 않는, 지금 상황에서 왜 그게 생각날까요? 뭐가 들키지 말아야 하는 20점짜리 시험인지 모르겠어요. 남자한테 돈 꾸어준 바보 같은 나인지, 여자한테 돈 꾸고 갚지 못한 그놈인지, 그놈이 전 여친한테 갔다는 사실인지. 도대체 뭐가 숨겨야 되는 20점짜리 시험인지 모르겠어요. 그냥 내가 20점짜리인 건지.”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염미정     


염미정은 언제나  무능력함과 좌절감으로 가득한 자신과 마주해야 하는 일상이 힘들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자신에게서 해방되려 한다. 외부의 소음이 아닌 그녀 내면의 소리에 집중한다. 그녀는 ‘나’라는 감옥에서 해방될 수 있는 자기만의 방법을 찾아냈다. 

먼저 기존의 동아리 중 하나를 선택하는 대신 본인처럼 동아리 가입에 부정적이고 망설이는 이들에게 ‘해방 클럽’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그들은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이냐고 묻는다. 미정은 각자 해방되고 싶은 것으로부터 해방되자고 말한다.     


“전 해방이 하고 싶어요. 해방되고 싶어요. 어디에 갇혔는지 모르겠는데 꼭 갇힌 것 같아요. 속 시원한 게 하나도 없어요. 갑갑하고 답답하고. 뚫고 나갔으면 좋겠어요.”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염미정   


그리고 술에 의존하는 구 씨에게 자신을 ‘추앙’하라고 말한다. 그러면 내년 봄은 분명 지금의 삶과는 달라질 거라고.... 미정도 구 씨를 ‘추앙’하겠다 한다.  그들은 ‘조건 없는 추앙’으로 온전히 누군가를 이해하고 수용한다.      


“날 추앙해요. 난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어. 내가 만났던 놈들은 다 개새끼.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가득 채워지게.. 조금 있으면 겨울이에요. 겨울이 오면 살아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렇게 앉아서 보고 있을 것도 없어요. 공장에 일도 없고, 낮부터 마시면서 쓰레기 같은 기분 견디는 거, 지옥 같을 거예요. 당신은 무슨 일이든 해야 돼요. 난 한 번은 채워지고 싶어.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사랑으론 안 돼. 추앙해요”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염미정     


‘추앙’이라는 단어는 매우 낯설고 종교적인 단어처럼 느껴진다. 사전적 의미로 “높이 받들어 우러러 봄”의 의미로 존경과 숭배를 의미하는 말이다. 사랑이라는 단어와는 분명 다른 차원의 말이다. 상호성의 원칙에 익숙한 우리 사회에서 사랑도 우리는 주고받는 관계로 인식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기준을 정해 타인의 모습을 정하고 재단하고는 맞추지 못하면 분노한다. 자신도 누군가의 기대를 충족시키려 노력하고 인정받지 못하면 좌절감을 느낀다.

이웃, 연인, 동료, 친구 관계에서 누군가에게 바라지 않고 순수한 관심과 사랑을 준다면 ‘나’는 평온해 질까? 그냥 타인의 사랑과 관심이 어디로 흐르던 그에게 흐르는 나의 사랑과 관심에만 집중한다면 어떨까? ‘나’의 에너지를 가두지 않고 누군가에게 자연스럽게 흘려보내준다면, 타인이 아니라 오로지 ‘나’의 에너지에만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해방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가능하다면 "당신이 원하는 것을 해 주었잖아. 당신도 내가 원하는것을 해주어야 해" “그 사람보다 내가 좋은 결과를 가져야 하는데” “난 항상 왜 이 모양이야.” 와 같이 '나'를 치사하고 초라하게 하는 열패감은 줄어들 것이다.  이것은 기존의 ‘나’를 해체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염미정은 타인들이 만든 정형화된 인간관계의 틀 뿐 아니라 스스로 자신에게 씌운 굴레로부터도 ‘나’를 해방시킨다. 주눅 들어 있던 나, 수동적이고 자기 방어적인 나로부터의 해방을 통해 ‘참을 수 없이 촌스러운 ‘나’’ 아래에 짓눌려 있던 ‘찬란한 ‘나’’가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 ‘나’로부터 깨어나다

저 내면 깊이 또 다른 ‘나’가 존재하는가? 독일 출신으로 21세기를 대표하는 영적 교사인 에크하르트 톨레 Eckhart Tolle는 자신의 책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A New Earth』에서 우리가 ‘나’라고 오해하고 있는 ‘에고’와 ‘진정한 나’의 모습을 구별하라고 말한다. 인간은 ‘에고’를 ‘나’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단다. 하지만 에고는 허구적인 정체성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사회, 가족, 나 스스로 요구하는 역할들과 기능들로 이루어진 고압적인 정체성, 염미정이 그토록 해방되고 싶었던 나, 그것이 에고인 것이다.     

 

“‘나’라는 단어는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가장 심각한 오류가 될 수도 있고 가장 심오한 진실이 될 수도 있다. 나에는 원천적 오류, 즉 자신이 누구라는 잘못된 인식과 환상에 불과한 정체성이 담겨 있다. 이것이 에고이다.”

에크하르트 톨레 (Eckhart Tolle)     


사실 나라는 자신은 살아온 환경에 의해 형성되면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것이 만들어낸 가치와 생각의 흐름에 말려든다. 튤레는 그 생각의 흐름 아래에는 그것에 영향받지 않는 공간이 존재한다 말한다. 그것이 ‘순수한 있음 being’이다. ‘순수한 있음’에 연결되는 순간 욕망, 고집, 고통으로 가득한 생각의 쓰나미로 젖어 있는 에고로부터 자유로워지며 평온함을 얻는다. 그는 에고가 만들어내는 심술궂은 일들을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 인식이 ‘새로운 나’가 등장할 수 있는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나’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내 안의 순수한 있음’을 깨닫고 진정한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당신의 생각은 당신 자신이 아니다.”라고 톨레는 조언한다. 나’라고 믿는 것이 어쩌면 허구일 수 있다고 그 사실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에고는 힘을 잃고 깊이 침잠해 있던 ‘나’는 깨어나게 될 것이라고..... 

    

* 참고 문헌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A New Earth』, 에크하르트 톨레 저, 류시화 역, 연금술사,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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