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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너 Jun 10. 2024

[기독교 윤리]

「팡세」 27장

기독교는 박애주의로 잘 알려져 있다. 예수가 유대인을 대표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희생한 것이 박애의 대표적인 예시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야기책이기 때문에 바울의 편지가 아니고서야 기독교인이 어떤 원리를 따라야 하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한 번에 읽기는 어렵다. 파스칼은 자신의 나름대로 기독교 윤리를 정리했다. 굉장히 잘 정리가 돼있어서 문장 몇 개를 따라 쓰는 것으로 충분하겠지만, 생각하는 갈대로서의 사명을 위해 나의 생각을 덧붙여야겠다.


이번 장의 핵심 문장은 아래와 같다.


"하느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만들고 나서, 하늘과 땅이 자신의 존재에 대한 행복을 전혀 느끼지 못하자, 그 행복을 알며 사고하는 지체들의 한 몸을 구성하는 존재들을 만들고 싶으셨다. 왜냐하면 우리의 지체는 그 결합에 대한, 그 감탄할 만한 지성에 대한, 거기에 영을 주입하고 그 영이 성장하고 지속하도록 하는 자연의 배려에 대한 행복감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지체들이 행복을 느끼고, 행복을 본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런데 지체들은 행복을 갖기 위해서는 지성을 갖추어야 하고, 전체 영혼의 의지에 동의하기 위해서는 선의의 의지를 가져야 할 것이다. 만약 지성을 얻고서도 그 지성의 양식을 몸의 다른 구성원에 보내지 않고 자신 안에 간직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은 일일 뿐만 아니라, 그 지체들은 비참하기조차 하며 서로를 사랑하기보다는 증오할 것이다. 지체의 행복은 그들의 임무처럼 지체가 속해 있는 전체인 영혼의 지도에 동의하는 것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이 영혼은 지체가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그들을 사랑한다."


나는 이 문장을 이렇게 해석한다. 처음에 창조된 것은 물질이었다. 그러나 물질은 감각이 없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래서 하느님은 생명을, 특히 지성을 갖춘 생물을 창조했다. 지성이 만물을 인지함으로써 하느님이 창조한 세계가 스스로를 인식할 수 있게 하려는 의도였다. 즉 인간의 지성은 독립적으로 존재하기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다. 지성은 세계의 일부로서 지성을 가진 지체 서로와 전체를 인식하기 위해 창조된 것이다. 즉 절대자 아래에서 모든 지성은 서로를 인지하고 서로 조화하는 것이 원래의 사명이다. "자신에 대해 가져야 하는 사랑을 조절하기 위해서는 생각하는 지체로 가득한 몸을 상상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 전체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떻게 각 지체가 스스로를 사랑해야 하는지 봐야 할 것이다. 만약에 발과 손이 개별적인 의지를 가졌다면 몸 전체를 지배하는 제1의 의지에 이 개별적인 의지가 복종하면서 발과 손은 질서 안에 머무를 것이다. 거기서 벗어나면 발과 손은 무질서와 불행 속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몸의 이익만을 원한다면 그것은 발과 손이 자신들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서 행하는 것이 된다."


즉 기독교는 하느님이라는 절대자를 상정하고, 이 세계의 모든 존재들을 그 아래에 복속시킨다. 절대자가 원래 내린 임무에 의거하면 인간의 지성은 세계의 지성이다. 인간은 지성을 이용해 만물을 지배할 힘이 있지만, 그 지배력은 본래 인간이 아니라 세계 전체를 위해 주어진 것이다. 인간이 지성을 사용해 세계로부터 독립할 야욕을 갖는다면, 세계 입장에서는 마치 팔다리에 뇌가 생겨 제멋대로 움직이는 꼴과 같을 것이다. 인간의 지성은 세계의 의지에 복종하며 세계의 조화를 구현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 그것이 원래 쓰임새이기 때문이다.


이상이 파스칼의 기독교 윤리 강의이다. 나는 절대자의 존재를 믿지 않지만, 실은 믿지 않기도 어려운 일이다. 있음을 증명할 수 없다고 해서 없음이 증명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이 세계의 조화를 사익을 위해 깬 것은 어느 정도 맞는 얘기이다. 예를 들어 지구 온난화 같은 환경 오염은 인간이 정도를 지나친 까닭에 일어났다. 인간의 지성이 기독교 윤리대로 세계의 조화를 우선시했다면, 자연을 극복하고 이용할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자연을 보살필 대상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지금의 안락한 삶도 어느 정도 포기해야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나는 세계에 선과 사랑을 보장할 존재로서 신을 원한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신이 있다면 그 존재만으로 세상에 이로운 규칙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기독교의 신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직접 나서지 않고 예언에만 기대면, 사이비 예언자들이 나타나 세상을 어지럽힐 것이다. 그래서 나는 신이 성경에서 말하는 하느님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세상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하느님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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