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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너 Jun 21. 2024

「팡세」 미분류 원고 12-17장

공백이 길었다. 사실 글을 어떻게 써야 할지 감이 도통 오지 않아서 글쓰기를 미뤘다. 12장에서 17장까지의 내용들은 성경에 대한 파스칼의 나름대로의 해석이 담겨 있는데, 성경 속 예언들이 역사 속 진실이 됐음을 증명하는 데 목적이 있다. 나는 솔직히 그런 얘기들을 믿을 수 없다. 그래서 쓰지 않고 바로 다른 장으로 넘어갈까 했지만, 생각을 최대한 많이 하려고 시작한 프로젝트에서 생각을 건너뛰는 것도 합당치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 글은 신앙의 힘에 대해 말하려 한다.


내가 교회에 다닐 적에, 가끔 신비한 체험을 한 사람들이 간증하러 교회를 방문했다. 어린이였던 내가 들어도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가슴을 울리는 사연들이 있어서 흘려들을 수도 없었다. 특히 한 사례가 기억난다. 한 어머니가 남편과 일찍 사별했다. 둘 사이에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아버지가 죽기 직전에 기독교에 입문해서 "내가 죽거든 천국을 지키는 문지기가 되고 싶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 후 아이가 꿈을 꾸었는데, 죽은 아버지는 정말로 천국의 문지기가 돼있었다. 아버지는 「신곡」의 베르길리우스와 베아트리체처럼 천국과 지옥을 구경시켜주었다고 하며, 아이는 깨어나 그 광경을 그림으로 그렸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는 감동스럽지만 믿든 말든 자유다. 하지만 간증을 하던 그 어머니는 자신의 이야기가 진실이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몇 번이고 목소리가 떨리고 눈이 글썽였다. 고도의 연기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사랑하는 남편이자 아이의 아버지가 천국에서 소원을 이뤘으며, 자신들도 언젠가 죽게 되거든 고인을 다시 만나 회포를 풀 수 있겠다는 믿음에 겨워있던 것으로 보였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믿음은 분명 객관적인 문제는 아니다. 특히 신앙은 객관적으로 말하기에는 너무 근거가 부족하고 빈약하다. 하지만 믿는 사람들 본인들이 그 믿음 덕분에 안심할 수 있고 행복을 그릴 수 있다면, 그 믿음을 지켜주어야 한다. 아이의 동심을 지키기 위해 산타클로스가 실재하는 듯 말해주는 것처럼, 신으로부터 위안을 얻는 사람에게 훼방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달콤한 믿음을 빼앗아서 내가 얻는 게 무엇인가? 신이 없어도 그런 짓은 죄다.


교회 수련회에서 한 전도사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기독교인은 사람이 죽어도 크게 슬퍼하지 않아.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아니까." 이 말을 듣고 얼마간 나는 죽음에 대해 무덤덤했다. 그때는 천국을 믿었고, 사별한 사람도 재회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믿음이 지금까지 가지는 못했다. 그래서 오히려 이렇게 믿을 수 있던 시절이 그립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기분이다. 믿음 아래서 사람은 부끄러움도 슬픔도 없이 잘 살았다. 늘그막에 기독교에 귀의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가장 슬픈 일 앞에서 위안을 찾으려는 시도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도 하느님이 있기를 바란다. 하느님이 아낌없이 우리 가족과 친구들에게 기적을 선사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런 믿음을 품기 위해서 하느님을 직접 만나길 바라고 있는데, 이 장벽은 허물어지지 않을 것 같다. 다만 이런 간절함이 언젠가 내 객관을 뒤집어서 나도 끝내 하느님이 실재한다고 믿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더라도 누가 나를 굳이 구하려 들지 말기를! 남들 눈에는 내가 수렁 안에 빠진 듯이 보여도 나는 그 안에서 나름대로 행복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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