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도록 기억해야 할 마음의 조각들
“퇴사한 직원을 단체사진에서 지워주실 수 있을까요?”
사진일을 하다 보니 여러 기업체와 연을 맺는다. 이미지 PR이 중요한 요즘 같은 시대에는 많은 기업들이 구성원 단체사진을 돈 들여 찍는다. 그래서 나도 혜택을 본다. 문제는 구성원은 계속 들고 나기 마련인 데 있다. 구성원이 바뀔 때마다 매번 새로 찍으면 좋지만, 여건상 그러기 힘들 수 있다. 그래서 같이 일하는 회사들이 종종 이직한 직원을 지우고 새로 들어온 직원만 따로 찍어 합성해 줄 수 있냐는 요청을 한다.
이런 요청을 받은 우리 회사 직원은 혼자 해보다가 내게 와 묻는다. “옆사람하고 겹쳐있어서 지우기 힘든 사진인데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이런 질문을 받으면 설명하지 않고 항상 하는 말이 있다. “가져와 봐요.”
백문 불여일견. 사진일을 할 때 특히 중요한 말이다. 백번 설명해서 들려주는 것보다, 어떻게 지우고 합성하면 되는지 한 번 보여주는 것이 낫다. 배우는 이도 이렇게 할 때 금방 깨닫는다. 기술에 필요한 과정이 ‘언어화'라는 인덱싱을 거치면, 아무리 말을 잘해도 부족하기 마련이다. ‘언어화' 없이 그저 한 번 시연하는 것만으로도 제일 많은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 보는 것. 보여주는 것. 가장 알려주기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여보, 그게 누구냐면, 김건ㅇ, 김근ㅇ, 박경ㅇ.”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사랑을 어떻게 하는 게 맞는 것인지 고민할 때마다 내가 떠올리는 지인들이다. 건ㅇ는 내가 입대하는 날 전화를 걸어 이등병의 편지를 불러줬다. 그리고 친구의 입대를 진심으로 응원해 줬다. 몸집도 자그마하면서 친구가 힘들 때마다 고목처럼 서서 기댈 수 있게 해 줬다. 그런 따뜻한 마음씨로 주위사람을 챙기며 살아가는 친구에게서 사랑하는 법을 엿보았다. 근ㅇ는 군대 선임인데, 힘들어하는 후임들을 속속들이 챙겼다. 그는 항상 이번 휴가 때 어떻게 하면 여자친구를 기쁘게 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제대하고 여자친구랑 결혼도 하고 싶은데, 든든한 남편이 되기 위해 의학 공부를 하겠다고도 했다. 머릿속 십중 팔 할 이상이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한 고민으로 가득한 사람이었다. 동갑이라 말년에 친구를 먹게 되어서, 휴가 때 여자친구도 소개받았다. 두 사람은 세상 누구보다 예뻤다. 경ㅇ이형은 내가 스튜디오 오픈하던 날 데려왔던 여자친구와 결혼했다. 이 형은 모험가 기질이 다분한 형으로, 세계 3대 폭포를 다 가보는 게 버킷리스트였다. 회사 일 말고 남는 시간은 죄다 애들이랑 노는데 쓰고 형수랑 함께하는데 쓰는 형에게 형수가 허락했다. 마지막 남은 빅토리아 다녀오라고. 그렇게 형은 세계 3대 폭포를 점령했다. 두 사람은 내게 부부가 어떻게 우정을 쌓아 나가는지 보여줬다. 그래서 아내에게 건ㅇ, 근ㅇ, 경ㅇ이형에게 배운 것들이 내가 더 잘하는데 보탬이 될 거라고 항상 설명하곤 했다.
근ㅇ의 아내가 많이 아팠다. 오늘 두 딸과 신랑을 남기고, 이제 더 안 아픈 곳으로 갔다. 식장에 들어서며 눈물이 왈칵 나려는데, 또 다른 친구가 얘기했다. 우린 울지 말고 씩씩하게 있다 가자. 그러면서 티슈를 챙겨줬다. 우린 그렇게 씩씩하려 노력하며 친구의 아내가 가는 길을 배웅했다.
군대에 있을 때부터 연애하기 시작해서, 근ㅇ는 마음먹은 대로 의사가 되고, 사랑했던 여자친구와 부부의 연을 맺고, 두 딸을 낳고 사는 모습을 보여줬다. “사랑이 뭐예요?”란 문제를 두고 “가져와 봐요.” 했을 것 같은 사람. 그런 두 사람 중 반 쪽이 떠났다. 의사가 됐는데 아내를 병환으로 보낸 그 마음을 감히 헤아릴 수나 있을까.
사랑하는 법을 일견 하게 해 준 친구를 위해 기도하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