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맡기미집에서 동성교배도 하게 해주면 안 돼? (22.03.31)
한국이 포켓몬 띠부띠부실로 들썩들썩할 때, 나는 포켓몬을 잡으러 다녔다. 운이 좋게도 닌텐도 스위치가 있다. 그렇다고 내가 뼛속부터 각 세대별 포켓몬스터 본가 시리즈를 읊는 포덕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남들이 아는 정도로, 피카츄 라이츄 파이리 꼬부기 노래 가사 속에 있는 애들 떠올릴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다 아르세우스 대학을 다니고 나의 성공시대 시작됐다.
어릴 때 지우랑 피카츄가 뛰어다니는 것만 기억하고, 몇 년 전에 그렇게 유명하던 포켓몬고도 안 했다. 아는 거라곤 하나도 없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포켓몬스터 8세대 실드를 샀다. 엔딩을 보고난 뒤엔 포켓몬스터 소드를 살 것을 하고 크게 후회했다. 나도 자시안 갖고 싶다. 개간지 자시안...
특히 포켓몬스터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컨텐츠는 '이로치✨(색이 다른 포켓몬)'을 뽑는 것이었는데, 대충 4000분의 1의 확률로 나온다나. 물론 포켓몬 아르세우스 기준이다. 본작인 8세대 소드실드 버전에서는 더 극악의 난이도라는데, 원래 랜덤 갓챠에 환장을 한 나에겐 아주 즐거운 일이었다.
소드실드를 기준으로 하면, 이로치를 뽑는 방법은 아주 단순하다. 아주 간단히 말해 여성 포켓몬과 남성 포켓몬을 '맡기미집'이라는 곳에 한 데 넣어, 둘 사이에서 태어나는 알을 부화시키면 된다. (물론 갓포켓몬인 메타몽을 같이 맡기면 성별무관 교배가 가능하다. 무성(에이젠더) 포켓몬도 교배가 된다. 이건 좀 재미있다.) 그러면 새로운 포켓몬이 짜잔, 하고 나타나는데, 그 중에서 색이 다른 이로치가 아주 낮은 확률로 발생하게 된다. 즉, 나는 색이 다른 귀여운 친구들을 찾기 위해 밤을 새도록 알을 까며 맡기미집 문턱을 닳도록 다녔다는 이야기다.
나도 개소리인 건 안다. 인간도 동물도 동성애로는 생명을 탄생시킬 수 없지. 하지만 들어보세요.
포켓몬 세계에선 이종교배도 가능하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대충 '육상형 포켓몬'이라는 대분류에 속하기만 한다면 토끼형 포켓몬과 햄스터형 포켓몬도 교배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전혀 다른 포켓몬인데도 말이다. 대충 말하자면 남녀이기만 하면 상관 없다는 뜻이다. 물론 메타몽이라는 논바이너리 친구가 모두와 함께 섹스하지만, 결과적으로 말해 그 친구는 남녀의 짝에서 빈 곳을 채워주는 것밖에 아니지 않나?
야, 이종교배도 되는데 동성교배는 왜 안되는데? 아가 포켓몬은 부모 따라 볼유전도 되는ㄷ
아니, 그래, 뭐, 동성교배로는 알을 안낳을 수도 있지.
그래도 동성섹스 없어?
하지만 안타깝게도 시스템적으로는 전혀 구현이 되어있지 않다. 맡기미집에 동성의 포켓몬을 가져다놓으면, '둘은 서로 따로 놀고 있다'는 말만 출력된다. 아예 서로 흥미가 없다는 소리다. 하여간, 이성애자들은 상상력이 없다.
태초에 동물의 숲이 있었다.
닌텐도의 은혜를 받아, 모동숲의 가호가 내리시니. 어릴 때 찢어지게 가난했던 탓에 동물의 숲은 그야말로 내 마음 속 전설 게임이었다. 다행히 번만큼 쓸 수 있는 과잉물욕의 삶을 살게 된 덕분에, 모동숲도 입문할 수 있었다. 정말 좋아하고 애정하는 힐링 게임이지만 두 가지만큼은 계속 뇌리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다.
외모지상주의와 성역할 고정.
외모지상주의야 인간의 눈은 빈약하기 그지 없고, 나 역시 눈이 동그랗고 사랑스러운 동물 친구들을 좋아하는 평범한 게이머이니만큼 별로 할 말은 없다. 랜덤하게 섬주민을 만나다보면, 기묘하고 독특하게 생긴 친구들과 마주하게 될 때마다 프로콘을 던진다. 그래도 가끔은 제작진놈들이 대단히 악질적이라고 느껴지는 것이다. 굳이 외모의 빈부격차를 만들어서, 인기주민과 비인기주민의 선을 만들 필요가 있었나? 물론 그래야 아미보 많이 팔아서 돈 벌기 좋겠지. 자본이 최고다.
동물의 숲 시스템을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해 짧게 설명하자면, 동물 주민은 무조건 여/남의 이분법 성별로 나뉜다. 또한 남성 주민은 무뚝뚝/운동광/먹보/느끼함으로, 여성은 단순활발/성숙/아이돌/친절함으로 성격이 고정되어 있다. 각 성격마다 내뱉는 대사와 상황이 갈린다.
참 기묘하다는 생각마저 드는 것이다. 대화를 나눠보고 있자면 여자 주민들은 요리를 좋아하거나, 책을 읽거나, 세계 최고의 아이돌이 되기 위해 다이어트를 하고 있다. 명백한 여성의 성역할 고정이다. 이게 두근두근문예부도 아니고, 여캐1은 귀엽고 깜찍하고, 여캐2는 조용조용하고 순종적이고, 여캐3은 성숙 츤데레일 필요가 있나? 새롭게 남캐에게 그런 롤들을 줄 수는 없는 건가? 여캐도 먹을 것도 많이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싸가지 없이 대해주면 안되나. 그리고 나도 여캐한테도 플러팅 받고 싶다. 느끼함 추가해줘라.
결국 하다하다 퀴어인 나와 친구들은 빅토리아(얘)가 수컷 공작새의 모양을 한 여성 주민이라는 이유로 퀴어라고 생각하고 있다. 방금 검색해보니 드랙퀸으로 상상가능한 친구(꺼벙) 등 성별에 고정되지 않은 패션 센스를 가진 친구들이 있다지만, 공식피셜은 아닌고로. 그나마 최근 모동숲에서 플레이어의 성별과 무관하게 자유롭게 옷을 입게 된 것으로 만족해야 하나.
포켓몬이나 동물의 숲이나, 거의 내 나이만큼 오래 먹은 게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만큼 발전한 그래픽과 게임성만큼이나 또 재미있는 상상력을 발휘하면 뭐 어떤가. 뭐, 피씨-하다고 질색팔색할 놈들은 있겠지만 내 알 바는 아니다.
물론 장애 영역이 전혀 구현되어있지 않지만. 심즈야말로 재치있는 게임이다. 심즈4에서는 남성 심도 임신이 가능하도록 구현해놓아 많은 삐엘 덕후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하지 않았나. 근본적으로 임신은 다양한 성별 정체성이 가능하면 좋겠다. 여자들만 가질 수 있다는 신성한 생명의 축복, 야, 남자 너두 누릴 수 있어.
시대는 발전해야한다. 때로는 후퇴하고 무릎꿇지만.
특히 게임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만드는 마법의 공간 아닌가. 존재하지도 않는 포켓몬도, 이족 보행하는 동물 주민도, 로봇청소기 타고 다니는 고양이도 있는데.
좀 재치있게 살자. 재미있게.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