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는 서울 소재 문과 대학원에서 5년간 수학하다가 학업을 접고 취업을 택한 사람입니다.
지금 다니는 이 회사에 들어온 지도 벌써 4년이 다 되어가는데요.
대학원에서 보냈던 시간만큼은 아니지만, 회사에서 쌓아온 시간이 꽤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여전히 대학원이라는 곳이 제게 남겼던 상흔과 영광을 가슴속에 동시에 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대학원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한 만큼, 마침 직장생활이 너무나도 무료하다 느끼고 있는 만큼, 지금이 이런 글을 쓸 만한 완벽한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 제가 그랬던 것처럼 인문계 대학원, 특히 문과 대학원에 진학을 하고 싶다거나 진학을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이 글이 어떤 식으로든 도움 혹은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
TV드라마든, 영화든, 현대의 어느 이야기에서든간에 (마블 세계관 나노 테크놀로지를 다룰 수 있는 만큼의 천재 공학도가 아닌 이상) 대학원생은 돈을 잘 벌지 못하는, 돈을 빨리 벌기 어려운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이 묘사는 현실을 꽤나 잘 반영하고 있는데요. 특히 문과 대학원생이라면 돈에 관해서는 애초에 생각을 안 하시는 것이 낫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2016년에 대학원에 진학했고 2년 6개월의 석사과정, 2년 6개월의 박사과정을 거쳤는데요, 이 기간 동안 조교일을 하면서 받았던 장학금, 여러 연구 프로젝트의 보조일을 하면서 간헐적으로 받았던 임금, (전공이 서양어문학이었던 덕분에) 개인적으로 벌었던 과외비 정도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돈을 벌어볼 만한 기회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무엇보다 석사과정에 있는 동안에는 이제 막 학사과정을 졸업한 풋내기에 불과하기 때문에 프로젝트의 보조 업무는 거의 제안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보시면 됩니다. 정부의 보조를 빵빵하게 받는 한국사학이나 국문학 전공이 아니라, 저처럼 서양 어문학, 철학과 같은 순수인문학을 전공하는 경우라면 더더욱 프로젝트의 보조 업무를 하게 되는 일은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보통 연구 프로젝트는 해당 학교에 소속되어 있는 강사 선생님들 혹은 교수님들이 연구재단이나 정부처 등에 지원을 해서 선정되어야만 진행할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이미 잘 알고 계시겠지만 문과 전공 기반의 프로젝트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큰 관심도, 그렇게 큰 지원도 제공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제 지도교수님이 그 학교로 옮겨 가셨던 것이 주된 이유이지만 개인적으로도 학교 간판도 더 그럴듯한 것으로 새로 달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기에, 저는 기존 모교를 떠나 SKY 대학 중 한 곳에서 석사과정을 시작하게 되었는데요. 지금에 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나마 학교가 가진 네임밸류와 규모, 네트워크 덕분에라도 타 학교의 동일 전공 대학원생 분들에 비해서는 프로젝트 보조 업무를 할 기회가 더 많았습니다. 사실 제가 대학원으로 택했던 학교가 기존 제 모교에 비해 교육 퀄리티가 특출 나게 더 나았던 것도 아니고, 학풍이 더 좋았던 것도 아니고, 교수님들이 더 훌륭했던 것도 아니기는 하지만, 내내 가뭄 같은 대학원생의 지갑에 그나마 간간이 돈이 들어왔던 데는 앞서 말한 학교의 대외적 이미지, 규모, 네트워크가 꽤 큰 기여를 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박사과정부터는 참여하는 연구 보조 프로젝트의 가짓수가 조금 더 늘어났고, 참여하는 프로젝트나 사업의 규모도 조금 더 커졌습니다. 한 건에 500만 원짜리 프로젝트 보조 업무도 맡게 되었고, 당시 '인문학 후학 양성'이라는 기치 아래 1년 내 sci 논문을 1편 집필하는 데 1500만 원을 지원해 주는 신진 연구자 정부지원사업에도 선정되어 돈방석(농담인 거 아시죠..)에도 앉아 보았습니다. 여전히 교수님들이 주는 소일거리에 어느 정도 의존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앞서 언급한 신진 연구자 정부지원사업과 같은 프로젝트는 처음부터 저 혼자 만들어나가야만 했습니다. 바로 이때, 박사과정생이란 더 이상 교수님들로부터 일을 받아서 하는 것이 아닌, 그들이 하는 일을 보조하는 것이 아닌, 나의 것을 만들고 나의 것으로 승부를 보아야 하는 포지션이라는 이해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부터는 이런저런 학회가 열릴 때마다 교수님을 따라가 여기저기 얼굴을 비추어야만 했고 나아가서는 제가 준비하고 있는 박사 논문 혹은 소논문을 정식으로 발표해야 하기도 했습니다. 100% 완성된 연구자는 아니었지만 이른바 반(半) 연구자 정도의 느낌으로 여러 가지 것들을 책임지고 챙겨야 했습니다. 석사과정 때는 거의 느끼지 못했던 성취에 대한 압박감 같은 것이 생겨나기 시작했던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압박감으로 인해 제 주변의 많은 동기들, 후배들, 선배들이 대학원을 떠났습니다. 사실 석사과정 때는 "얘가 참 잘하더라, 쟤는 좀 아쉽더라." 하는 얘기가 아예 오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자주 오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때는 "얘가 참 성실하더라, 쟤는 좀 게으르더라." 하는 식의 학업적 태도에 관한 이야기들이 더 자주 오가는 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석사과정생의 학업적 성취도가 엄청 높지 않다고 해서 아무도 "넌 대체 뭘 하겠다고 여길 들어온 거야!"하고 호통을 치거나 면박을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박사과정이 시작되고부터는 확실히 "얘가 참 잘하더라, 쟤는 좀 아쉽더라."의 담론이 훨씬 큰 힘을 얻고 잦아집니다. 물론 우습게도 그렇다고 해서 "얘가 참 성실하더라, 쟤는 좀 게으르더라."의 담론이 아예 힘을 잃고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다는 것도 아닙니다. 박사과정생은 이전과 다름없이 성실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이제는 잘해야 합니다. 남들과 비등한 혹은 더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어야 하고 남들이 생각해내지 못한 유니크한 주제와 접근방식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박사 졸업 논문과 그 과정에서 쓰게 될 몇몇 소논문, 하게 될 몇몇 발표에 모두 다 녹아들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반 연구자에서 70% 정도의 연구자로, 90%의 연구자로 점점 레벨업(?) 게이지를 높여갈 수 있고, 그래야만 기존의 연구자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대학원을 떠났던 사람들 중에는 대학원 내 교수들의 부조리를 참지 못해 떠나야만 했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 기준 주변에 10명이 있다고 한다면 7명이 대학원을 떠났고 그중 5명이 부조리를 견디지 못해 떠났으니까요. 그리고 저 자신이 사실 그 5명 중 1명에 속합니다. 대학원에 다니는 내내 나쁘지 않은 장래를 점치며 밥 벌어먹고살 만한 정도의 능력은 있겠다는 얘기를 들었고 제가 하는 공부를 좋아하기도 했던 저이지만, 저는 결국 대학원을 떠났습니다. 주된 원인은 지도교수와 모교 교수의 크로스 부조리 - 임금 미지급, 온갖 잔심부름 지시, 술자리 호출 및 강요, 수업 땜빵, 인격모독적 언행 - 였습니다. 저는 어느 봄날 "감히 자신이 싫어하는 교수의 일을 도와줬다며, 이것은 자신에 대한 배반행위라며" 쏘아붙이는 교수의 전화를 받았고, 결국 제가 너무나도 사랑했던 그 학문에 이별을 고했습니다. 제 지도 교수님 그리고 배반과 배신을 들먹이며 저에게 호통을 쳤던 제 모교 교수님은 놀랍게도 학부생 시절 저에게 너무나도 친절했던 분들이었습니다. 전공공부에 열정과 재미를 가지고 몰입하는 저를 신기해하셨고 대학원에 가도 좋겠다며 먼저 제안을 하고 격려를 해주셨던 분들이 바로 그분들이었죠. 그리고 이런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저 혼자만이 아닙니다. 제 주변 같은 전공의 동기들, 후배들, 선배들 중 많은 사람들이 부조리를 경험을 했고 많은 다른 전공의 대학원생 동료들도 마찬가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인해, 저는 대학원에 진학하려는 학부생 분들이 꼭, 부디, 제발 장래 지도교수가 될 수도 있는 교수님들에 대해 철저한 사전조사를 하셨으면 합니다. "저희 교수님은 진짜 좋으신 분인데요."라고 반론을 제기하실 수도 있고 실제로 그 교수님이 정말 좋으신 분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인성적인 면에서 장래 지도교수님에 대한 최대한 많은 정보를 확보하셔서 신중한 판단을 내리시기를 바랍니다. 주변 선배들을 붙잡고 최대한 교수님 귀에 들어가지 않는 선에서 교수님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물으시기를 바랍니다. 인성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든 상관없으나, 되도록이면 그 교수님 아래에서 실제로 공부를 하고 있는 혹은 공부를 한 적이 있는 대학원생 선배들로부터 정보 얻는 것을 추천합니다. 만약에라도 주변 선배들에게 묻는 것이 많이 어려운 상황이라면, 학부생 선배들한테라도 꼬치꼬치 캐묻고 에브리타임 같은 익명 플랫폼을 뒤져서라도 교수님에 대한 정보를 많이 얻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인성도 인성이지만, 교수님의 학문적 발자취와 업적에 대해서도 한 번쯤은 진득하게 미리 알아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학부생 입장에서야 교수님이 써낸 논문들을 명확히 이해해 내는 것이 어려울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이 발표한 논문의 주제나 메시지나 방향성 같은 것들을 살펴봄으로써 내가 하려는 공부와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그 교수님이 말하는 것과 조금이라도 닮아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석사논문과 박사논문 모두 지도교수님의 조언과 방향성을 많이 따라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 부분도 교수님의 인성 파악 미션 못지않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도교수가 별로면 바꾸면 되지 않나?"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간혹 계시지만, 이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시는 것이 마음이 편합니다. 행정상으로는 가능한 것이 맞지만 도의적으로는 불가한 것이죠. 특히나 관계지향적이면서 동시에 폐쇄적인 국내 대학원, 국내 문과 학계에서는 '지도교수를 바꿨다'가 곧 배신, 배반, 반항으로 읽힐 수 있다는 점을 (치사하고 더럽지만) 유념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사전에 철저히 알아본 후 진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이 역대급 소시오패스이자 지능캐여서 앞서 파악했던 정보와 완전히 상충되는 빌런급 면모를 보이는 분이라면, 그때는 내가 이 모든 것을 버텨내서라도 이 공부를 계속해야겠다는 의지가 있는지, 그렇게 버텼을 때의 현실적인 성공가능성이 충분히 높은지, 현실가능성은 둘째치고 교수님의 행동이 그 자체로 너무 부조리하거나 과도하게 부당한 건 아닌지 고민을 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이런 꼴을 보느니 그만두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바로 든다면, 그때는 바로 그만두셔도 됩니다. 하지만 그만 두기에는 내가 이 학문을 너무 사랑한다, 그리고 꽤 잘하기도 한다 하는 경우라면 교수님에게 어떤 식으로든 컴플레인을 하거나 꿈틀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아무리 공감능력과 사회성이 크게 결여된 교수님이라 할지라도, 요즘엔 세상이 소식도 빠르고 쉽게 퍼져나가는 걸 너무나 잘 아시다 보니, 그런 굼벵이 꿈틀 방법이 종종 먹히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꿈틀거려도 봤고 컴플레인도 해봤고 버텨도 봤는데, 이 교수님에게 전혀 변화가 없다, 그리고 나 자신이 너무 괴로워서 삶이 무너지고 있는 지경이다라고 한다면 그때는 결국 돌고 돌아 그만두신 후 취업을 하시거나 아예 해외로 나가서 공부하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이런 괴롭고 복잡한 일에 뭐 그렇게 간단히 말해! 하실 수도 있겠지만, 제 경험상 이 선택지가 전부입니다..)
간단히 쓰려고 했는데, 지나온 시간을 떠올리며 이것저것 붙이다 보니 조금 길어졌고 대학원을 너무 끔찍한 곳으로 그린 것 같아 조금 민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가 서두에서 "대학원은 저에게 상흔과 영광 두 가지 다 남겼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독립적인 방식으로 나의 생각을 개진하고 나의 논리를 세우고 그렇게 나의 메시지를 전함으로써 인정, 나아가서는 금전적 대가까지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연구자가 되고자 대학원에 간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입니다. 비록 저는 지금 평범한 직장인이 되어 회사에 다니지만, 소모적이고 반복적인 일들에 지칠 때면, 제가 대학원에 다니면서 썼던 글이나 논문이나 작성했던 필기 등을 보면서 저에게도 이런 사고의 힘이 있었구나, 추진력이 있었구나 하면서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꼭 대학원에 들어가서 대학원 사람들이 세워놓은 기준의 수료, 졸업, 유학 등에 골인하지 못하더라도, 내가 자립적으로 부딪히면서 무언가에 파고드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꽤나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열정이 있어야 하고 재미를 느낄 줄 알아야 하며 그 무엇보다도 공부하시려는 그 전공에 평균 이상의 재능과 감을 가지고 계셔야 합니다.
어딘가에 있을 장래 대학원생 혹은 현재의 대학원생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진심을 담아 썼습니다. 계획하고 있는 일, 꿈꾸고 있는 목표, 되고 싶은 장래의 모습 모두 다 순탄히 이뤄지기를 바라며, 저는 여기에서 이만 글을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아래는 제가 앞서 써놓았던 유의사항을 대략 10가지로 정리해 둔 리스트입니다. 글을 다 읽기 부담스러우신 분들은 이 리스트를 보고 필요한 부분만 골라 보아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과 대학원 진학 전 유의사항]
1. 큰돈을 벌 기대는 하지 말 것.
2. 모쪼록 인프라, 네트워크, 규모감이 큰 학교를 택할 것.
3. 석사과정생은 성실함만 있어도 중간은 간다.
4. 박사과정생은 성실함과 실력, 두 가지 모두 갖춰야 한다.
5. 대학원에는 정말 더럽고 치사하고 무서운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6. 진학 전, 지도교수에 대한 최대한 많은 정보를 확보하여 최종 결정을 내릴 것.
7. 지도교수는 한번 정하면 (웬만하면) 바꿀 수 없다.
8. 지도교수가 지속적으로, 반복적으로 부당한 대우를 한다면, 적어도 가만히 있지는 말 것.
9. 열정이 있는지, 재미를 느끼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나에게 재능이 있는지를 파악해서 진학을 결정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