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지평을 넓히는 한국 미식 시장
소프트파워는 교육, 언어, 예술, 기술 등 실로 다양한 범위를 포괄하는데, 오늘은 그중에서도 '미식'을 키워드로 다뤄보고자 한다. 개인적으로 소프트파워 중에서도 '미식' 주제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 우리 일상에서 매일같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범용성 넓은 예술(특정한 형식으로 미를 창조하고 표현하려는 인간 활동) 중 하나이자, 음식을 통해 사람과 문화를 쉽게 어우러지게 하는 점이 좋기 때문이다.
최근 너무 가까이 있어 그 소중함을 몰랐던 '요리의 가치'를 재조명한 넥플릭스 ≪흑백요리사:요리 계급의 전쟁 (이하 흑백요리사)≫ 프로그램이 있다. ≪흑백요리사≫는 한국 요식업계에 종사하는 재아의 고수 셰프들부터 이미 대중에게 얼굴이 알려진 스타 셰프들까지 총 100명의 셰프들이 맞붙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으로, 2024년 9월 16일부터 22일까지 넷플릭스 글로벌 톱 10 TV 비영어 부문 1위를 차지했다. 약 일주일 동안 400만 뷰에 가까운 시청수는 장안의 화제라는 표현을 몸소 보여주었는데, 이 화제성보다 주목해야 하는 것으로 이 프로그램 기획 효과를 언급해볼까 한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OTT 플랫폼을 통해, 각자의 방식으로 ’예술‘을 행하고 있는 요리사들이 한국에 이렇게 많다는 것을 보여준 점, 그리고 세계인에게 한국을 방문해 이런 음식과 문화를 체험하게 싶도록 만든 점. 하나의 프로그램에 담긴 이러한 기획력은 ‘한국 미식’이 K-소프트파워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올해 9월 뉴욕에 다녀오며 가장 기대했던 일정 중의 하나가 La Liste에 소개되어 있는 Le Bernadin 레스토랑 방문이었다. 이 레스토랑은 업무 차 La Liste 플랫폼을 알게 되면서 눈여겨본 곳인데, 약 한 달 반전에 예약을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소 애매한 점심 시간대만 예약이 가능했었다. 한국이었다면 '굳이..'라고 생각하며 방문을 망설이는 마음이 컸을 텐데, 조금 애매한 시간의 식사라도 뉴욕에서의 파인다이닝이라니! 자주 오지 않는 기회라는 생각에 서둘러 자리확보를 했던 기억이 난다. 살짝의 불편함보다 설렘과 기대감으로 가득했던 뉴욕 '스몰럭셔리' 여정의 시작이었다.
Le bernardin은 RESY라는 (한국의 캐치테이블 같은) 플랫폼을 통해서만 예약이 가능했다. 예약 시 노쇼 방지를 위한 카드등록이 필수고, (파인다이닝답게) 손님의 알레르기 유무, 기타 요청 사항 등을 상세하게 레스토랑과 공유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파인다이닝은 예약하는 과정부터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순간까지 일련의 과정을 총체적으로 포괄하는 서비스와 경험이라고 생각하는데, Le bernardin을 예약하며 느꼈던 세심함은, 예를 들어 드레스코드 안내를 통해 레스토랑 에티튜드를 사전에 교육받는 기분, 식사 당일 음식을 오감으로 경험하고 느낄 수 있는 서비스를 받는 것 등, 평범한 일상에서 상대적으로 쉽게 접근하고 체험할 수 있는 ‘스몰 럭셔리’의 단상이었다.
Le Bernardin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스몰 럭셔리였다면, 미식을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체험의 확장'이라는 관점으로 제주 '해녀의 부엌'을 이야기해볼까 한다. 약 2년 전 제주도에 갔을 때 알게 된 '미디어아트 레스토랑, 해녀의 부엌'은 약 100-150분 동안 제주와 북촌리, 해녀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진행되는 공연과 함께 제주 식자재로 요리된 음식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엄밀히 말해 파인다이닝으로 분류되는 식당은 아니지만 59,000원으로 경험하는 ‘오감 체험형 미식’의 훌륭한 사례라고 생각하는데, 이유는 제주 해녀의 삶이라는 로컬 스토리를 듣고/보고/맛보는 경험은 미식의 저변이 다양한 형태로 확장해나가고 있는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파인다이닝은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로 꾸며진 공간, 귀하고 신선한 식재료가 사용된 고급 요리, 예술적인 플레이팅 등 다양한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고려되기에, 혹자는 Le Bernardin과 해녀의 부엌을 함께 언급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꼭 파인다이닝에서 제공하는 비싼 음식이 좋은 체험과 요리의 진정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듯,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미식‘도 다각도로 그 영역을 확장해나가고 있는 모습은 상당히 고무적인 시사점을 준다고 본다. 뉴욕에서든 제주에서든, 한 끼 식사에 진정성이 담겨있다면 '미식'이란 일상에서 체험할 수 있는 스몰 럭셔리 그 자체일 테니 말이다.
최근 회사에서 소프트파워 콘텐츠의 하나로 'F&B 행사 - Next Gastronomy 2024 Seoul'을 기획하게 되었다. 세계적인 미식 가이드의 가이드라고 불리는 La Liste의 2번째 한국 귀환을 맞이하며, 국내 미식 콘텐츠 플랫폼 Metizen과 한-유럽 싱크탱크 KEY(Korea Europe & You)가 공동 주최한 이번 행사는, 한-유럽 F&B 씬의 오피니언 리더들과 함께 F&B 산업의 기술과 혁신, 소비자 동향을 파악하고 다가올 트렌드를 전망하고자 마련된 자리였다.
간단히 이번 행사에 참여하며 F&B 오피니언 리더분들의 강연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흥미로운 인사이트를 3가지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해외에서 느끼는 한국 소비자 미식 동향
이번 포럼을 통해 가장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빠르게 변화하는 한국 소비자 동향이 세계 F&B 시장을 주도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강연자 중 한 분이었던, (세계 최대 유제품 업체) 락탈리스 그룹 코리아의 영업 및 마케팅 담당자에 따르면, 한국 소비자의 기호도 및 소비자 선호도(환경 규제부터 미식 트렌드 등)가 아시아 시장을 선도하며 오피니언 리더로서 역할하고 있다고 한다. 규모의 경제로 볼 때, 아시아에서 싱가포르, 홍콩, 중국 등 한국을 능가하는 자본 시장이 있지만, 현재 '한국에 대한 단순 선호도 증가’로 한국 소비자의 기호 및 한국 F&B 시장의 인사이트가 아시아 그리고 유럽의 사업 전략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한다.
유사한 맥락으로, 유럽에서 한국 소비자의 미식 동향을 피부로 체감하는 사례도 소개되었다. 한국 MZ 세대들이 프랑스 파인다이닝을 경험하는 비율이 증가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는데, 구체적으로 파리의 'Restaurant Guy Savoy (La Liste 99.50 레스토랑)'에 방문하는 2030 한국 소비자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Guy Martin 셰프님의 'Le Grand Véfour'에 방문하는 젊은 한국인의 비율이 상당히 높아졌다는 것이다. 유럽 F&B 관계자에 따르면 이러한 현상은 상당히 흥미로운데, 이유는 비주류였던 한국 미식 시장의 잠재성을 느낄 수 있는 지표인 동시에 레스토랑 운영이라는 실무적인 측면에 직접적으로 반영될 수 있는 인사이트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2. Mixture 문화로 대변되는 ‘요즘의 한국다움’
과거와 달리 '한국다움'이라는 말에 한복이나 오방색 보자기를 떠올리는 시대는 지났다. K-Pop, K-Drama, K-Fashion 등 이제는 한국을 대표하는 수많은 소프트파워 콘텐츠가 국위선양을 하고 있고, 오히려 이러한 다양한 콘텐츠의 등장과 변화를 빠르게 수용하고 적용하는 Mixture 성향이 ‘한국다움’을 대변하고 있다. 유행에 민감한 한국 사회에서 mixture 전략은, 브랜드 혹은 산업 간의 상생을 도모하고 새로운 시장으로의 진입 장벽을 낮추고 있음이 여러 가지 사례를 통해 소개되었는데 몇 가지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무신사 스포츠본부 본부장이자 유투버 Wadi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고영대 강연자의 말에 따르면, F&B 업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현상으로 다양한 collaboration 사례를 이야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패션과 음식의 협업 사례로 'KITH x Nobu'를 보면, 각 영역에서 독보적으로 가지고 있는 두 브랜드 이미지와 역량이 결합되어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였으며, SNS를 통해 이런 독점적인 경험이 'show off'되며 하나의 문화로 변모해 나가는 모습을 통해 새로운 가치가 창출되고 더 넓은 시장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협업의 장점을 보여주는 위의 사례는 Newmix Coffee가 강조하는 'Mixture' 개념과도 맞닿는 지점이 있다. Newmix Coffee는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에게 상징적인 기념품이 될 수 있는 믹스커피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해석해 '요즘의 한국다움'으로 풀어 나가고 있는 브랜드다. 모던한 흑백 패키지 디자인과 빨리빨리 정서가 담긴 믹스커피의 조화. 이는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에게 '한국다운 기념품'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의도와 '믹스커피에서 시작해 믹스를 문화'로 만들어나가고자 하는 그 방향성을 밀도 있게 보여준다.
3. 기술의 발전과 함께 넓어지는 미식의 저변
위에서 언급한 한국 소비자의 미식 동향을 따라가다 보면, 한국 미식 문화의 확장을 주도해나가고 있는 것은 MZ세대들 덕분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코로나 19 팬데믹 당시,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한 파인다이닝 소비문화는 SNS를 통해서 빠르게 확산되었는데, 그러한 '보여주기식' 분위기가 조성되고 하나의 문화 현상이 가능했던 것은 Tech-savvy 한 MZ세대의 역할이 컸다고 본다.
알고리즘 기반으로 세계 1,000개의 레스토랑을 매년 선정하는 La Liste, F&B 콘텐츠 플랫폼으로 업계의 소식을 온/오프라인으로 생생하게 전달하는 Metizen, 그리고 미식 문화가 소비자에게 깊고 빠르게 확산되는데 앞장서고 있는 Catch Table 플랫폼. 이 모든 기술 기반의 F&B 사업 아이디어가 탄생해 실현되기까지, 그리고 이러한 플랫폼이 일상 속에 스며들며 사람들의 생활 패턴과 소비 습관에 변화를 주기까지 - 한국 미식의 저변이 이렇게 단시간 내에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변화를 빠르게 수용하는 Tech-savvy 한 한국 MZ세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위에서 언급된 락탈리스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지만, 한국 소비자 동향이 세계 F&B 업계에 유의미한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실제로 K-Food를 체험하고자 하는 니즈가 꾸준히 증가하면서 실제 관련 수출이 우상향곡선을 그리고 있는데, 2023년 우리나라 라면 수출액이 처음으로 1조 2000억 원을 돌파한 점, 김 수출이 처음으로 1조를 넘긴 점(출처), 이제 한국 식음료제품은 해외 한인마트에서만 파는 특별한 상품이 아니라 현지 마트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일반 상품이 된 점, 그리고 한국에서 인기를 끄는 *K-브랜드들의 해외진출도 꾸준히 증가하는 점 등이 모두 이러한 현상을 체감할 수 있도록 해준다.
*K-브랜드들의 해외진출 사례로는, 한국인과 기업을 대상으로 미국 부동산 토털 솔루션을 제공하는 회사 '빌드불록'과 손잡고 미국 시장 진출에 앞장서고 있는 GFFG의 사례(출처)와 사모펀드 VIG 투자를 받으며 미국, 프랑스, 태국, 베트남 등 해외 400여 매장을 운영하고 있는 본촌인터내셔널(출처)을 이야기할 수 있다.
K-Food와 함께 K-Gastronomy도 유사한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치열한 미식의 요지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뉴욕 등에서 양식만 독보적으로 미식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2023년 요식업계의 오스카상으로 불리는 제임스 비어드상(James Beard Awards) 수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박정현 셰프의 'Atomix' 식당을 뉴욕 미식 업계에서 빼놓을 수 없고, Pierre Sang의 Pierre Sang in Oberkampf 레스토랑도 파리 미식가들에게 선망의 장소가 되었다. 과거 '미식'이라는 단어가 프랑스의 분자 요리나 뉴욕의 5성급 호텔에서의 만찬만을 떠올리게 했다면, 이제 무서운 속도로 뻗어나가는 K-Food와 K-Gastronomy도 독보적이고 독자적인 형태로 한국의 ‘맛과 멋’을 세계에 알리고 있다고 보인다.
다시 ≪흑백요리사≫로 돌아가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이 프로그램을 보며 제일 인상 깊었던 점은 한국에서 요식업에 종사하는 다양한 인물들의 발굴, 그리고 그들 모두를 '전문가’로서 조명하였다는 사실이었다. 프로그램 출연진으로 급식대가, 장사 천재 조사장 등 매력적인 인물이 여럿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모수 서울'을 운영하고 있는 안성재 셰프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는 '모수를 운영하면서 가장 고마웠던 손님으로 '특별한 날을 위해 꼬박꼬박 모은 돈으로 방문하는 손님 (출처 영상)'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훈훈한 외모에) 인간적인 따스함이 느껴지는 인터뷰이자, 개인적으로 요식 업계의 종사자로서 가져야 할 두 가지 시사점을 잘 보여주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첫째, 'fine-dining'이 누구에게나 당연한 일상으로 여겨지는 시대는 'fine'하지 않은 사회일지 모른다. 20-40세대의 스몰 럭셔리 소비자 성향 중 하나가 파인다이닝 체험이라지만, 파인다이닝은 특별한 날에 특별한 경험을 위해서 방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때문에, 어떤 면에서 파인다이닝 업계의 성장은 한정적일 수뿐이 없고, 파인다이닝이 '미식을 통한 소비자 경험의 확장'이란 방향성을 벗어난다면 영혼/진정성을 잃은 음식으로 전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 끼에 20-70만 원까지 하는 식사에 내포된 럭셔리 경험의 가치만큼이나, 대중의 일상 속에서 접할 수 있는 '미식의 가치'도 그 중요성도 잃지 않아야 보다 지속가능한 미식 시장의 발전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둘째, '미식'은 처음부터 끝까지 창작자와 감상자/수용자 사이의 소통이다. 이제 한국에도 글로벌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혹은 글로벌 셰프로 성장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는 인물들이 많아졌고, 동시에 미식의 가치를 존중하는 소비자도 많아졌다. 앞으로 중요한 것은 이 고무적인 분위기가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지속가능한 방향성을 가지는 것일 텐데, 이는 이런 현상을 대하는 우리 태도를 통해서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 셰프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 끼 식사에 측정되는 가격 보다 손님을 향한 Attentiveness(누군가에게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태도)와 요리하는 자세일 것이고, 소비자에게 중요한 것은 좋은 미식 문화를 통해 내 경험의 폭을 확장해 나가는 것, 그리고 그 저변에 있는 사람과 문화의 가치를 존중하는 태도 말이다.
고고한 예술로서의 고급 요리가 아니라 '범용성 넓고 경험의 지평을 넓히는 예술'로 K-Gastronomy 문화가 성장할 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진정한 K-소프트파워의 역량도 더해지지 않을까 생각하며.. 글을 마무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