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도한 '예술'을 바라보는 시선의 전환
최근 투자자산운용사 시험을 보고, ESG를 비롯한 다른 분야의 화두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가장 많이 들은 질문 중 하나는, ’이직할 생각이야?‘였다. 당장 문화예술계를 벗어날 생각이 있는 것도, 이 분야만을 고집하는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오늘은 그동안의 의식의 흐름을 connecting the dots 해볼까 하며 글을 시작한다.
업무 역량을 넓히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작년부터 예술 언저리의 경험을 기록하고, 앞으로의 방향성을 가늠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브런치 포스팅을 시작했었다. 되돌아보면 아주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하는 게, 포스팅을 하기 위해 글을 써내려 가다 보면 부유하는 생각들이 정리되는 것은 물론 지나치기 쉬운 기억과 감정을 되짚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그 과정을 통해 '예술'을 하나의 산업군이 아니라 하나의 콘텐츠로 바라보자는 배움을, '금융'과 '마케팅'이라는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두 분야를 통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어릴 때부터 탐미주의 기질이 있어서인지 예술 분야에 관심이 많았지만, 내가 '미술 산업'에 직접적인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프랑스에서 지냈던 짧지만 유의미했던 시간 덕분으로 기억한다. 당시에 파리에서 '명품 산업 (luxury marketing)'에 대해 공부하며 관련 콘텐츠에 노출될 기회가 많았는데, 당시 명품 브랜드들이 미술을 이용한 마케팅, 시즌별 아티스트와 협업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등 예술과 맞닿아있는 행보를 적극적으로 확장하고 있는 것이 흥미롭게 다가왔었다. 특히 지난 30년 동안 Fondation Louis Vuitton, Fondazione Prada, LOEWE Foundation, 그리고 Fondation Cartier pour l'art contemporain 등과 같은 다양한 명품 브랜드에서 설립한 재단을 알게 되고, 방문해 본 것은 유럽살이의 최대 수확이라고 생각한다.
명품 브랜드와 예술의 협업,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로는 '예술'이 가지는 독창성, 원본성, 그리고 희소성의 가치를 브랜드 이미지에 더하고자 함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예술'의 범위는 '영감의 원천을 구축하는 모든 것'을 아우른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브랜드가 협업하는 분야가 단순히 미술 및 패션 등 우리가 단편적으로 인식하는 예술의 경계선을 벗어나 과학, IT, 기술 등으로 그 저변이 점차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명품 브랜드들이 자사 기업의 역사와 전통을 숭상함과 동시에 오늘날의 소비자들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명품 브랜드의 예술화(artification)'를 구현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 <명품의 예술화(The Artification of Luxury, 2014>, HEC 경영대학원의 카프레르(Jean-Noël Kapferer) 교수
국내 미술시장의 변화
'명품 브랜드의 예술화'를 비롯해 '예술'이 대중화 및 상업화의 영역에서 보여주는 다양한 활동들이 흥미롭던 차, 미술시장(scene)을 경험 및 이해하고 싶어서 한국에 귀국하며 갤러리에서 일을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그 시간에 2022년 국내 미술시장을 경험한 것은 아주 값진 일이었다고 생각하는데, 국내 미술시장의 폭발적 성장과 그 이후를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022년은 코로나 19로 세계 경제가 위축된 상황에서 역설적으로 국내 유동액이 미술품으로 향했던 이례적인 해이다.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의 23년 1월 4일 자 보도자료에 따르면 당시 미술시장 유통액은 1조 377억 원을 돌파하는 기록을 세웠고, 전년대비 37.2% 성장하였다고 한다. 물론 미술시장의 규모가 큰 나라에 속하는 편은 아니기 때문에, 이 수치 자체가 엄청난 시장 규모를 대변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2021년과 2022년을 거치면서 한국도 '미술품 투자의 시대'로 향하는 잠재성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미술품 투자의 시대
문체부에 따르면 2022년 미술시장의 이례적인 성장을 지나, 2023년에는 미술시장의 규모가 전년대비 15.1% 감소한 수치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물론 (시장 규모가 작은 한국 미술시장의 기반이 다져져야 한다는 이야기는 논외로) 성장세가 반짝하고 만 것에 아쉬운 마음이 들지만 팬데믹이라는 예측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미술품'에 대한 인식의 개선을 체감할 수 있었던 것만큼은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과거 특정 계층만 미술품을 소비한다는 인식이 강했던 것과는 달리, 최근에는 MZ세대가 자신의 취향 및 취미로 재테크까지 경험하려는 현상이 증가하고 있고, 실제로 갤러리를 통하지 않고 작가와 SNS를 통해서 직접 소통 및 작품 구매까지 이어가는 적극성까지 보이는 것이 상당히 고무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2024년 1월 국내 1호 투자계약증권을 발행한 열매컴퍼니 사례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앞으로는 '미술 및 예술품'을 하나의 금융 상품으로 바라보는 투자자의 시선과 시장의 변화가 지속되면서 '아트 파이낸스(Art Finance)'가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 대중화되는 것도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정량적인 분석을 통해 수익을 예측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은 대체투자 영역이지만, '예술'을 바라보는 시선을 조금만 전환해 본다면 충분히 많은 가능성을 예측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도시와 연계한 팝업스토어 마케팅
2024년 2월호 동아 비즈니스 리뷰 잡지에는 '팝업 공화국의 미래'라는 에디터의 글로 시작해 <글로벌 팝업스토어의 현황과 전망>에 대한 리포트가 비중 있게 실렸다. 성수동을 필두로 다양한 지역 곳곳에서 팝업스토어 마케팅이 진행되고 있는 현상을 돌아보기에 아주 좋은 글이었는데, 제화산업의 중심지로 투박한 잔상이 가득한 성수동이 이제는 ‘팝업 스토어' 덕분에 체험형 경험을 하기 위해 다채로운 외관으로 변모한 과정을 다시 한번 되짚어볼 수 있는 글이었다.
팝업 마케팅을 이야기할 때 성수동을 빼놓을 수 없듯, 그 문화를 선도한 Project Rent(프로젝트 렌트)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 몇 년 전에 처음 발을 내딛기 시작하는 '프로젝트 렌트' 사업 모델이 너무 흥미롭고 신선하게 다가와 익숙하지 않은 성수동을 탐방하러 자주 갔던 기억이 있다 - 2018년에 론칭한 이 회사는 소규모 브랜드에 서울의 유휴 공간을 임대하고 팝업스토어 기획 및 제작을 대행하는 사업 모델을 제공하는데, 소위 팝업스토어 전용 공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성수동이 지루 할 틈 없이 다양한 브랜드가 새롭게 선사하는 경험으로 가득한 데에는 아마 이 회사의 역할이 주 축을 이루었을 것이다. 그리고 프로젝트 렌트가 이끈 성수동을 필두로, 이러한 분위기는 전국으로 확장 중인데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트렌트가 공공의 기능 확대는 물론 다채로운 도시의 파사드를 연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역 재생의 맥락에서 상권이 죽어있는 동네에서 문화기획 행사를 기획하는 것, 그리고 지속적인 인구 감소추세가 보이는 도시에 팝업형 공간을 도입하는 것 모두 도시의 성격 및 외관의 변모에 직간접적으로 다양한 변화를 제공하고 있다. 결국, 이제 팝업은 단순히 브랜드 혹은 회사의 test-bed를 위한 마케팅이 아니라, 도시의 한 외관을 어떻게 연출하는지까지 고려하는 ‘예술’의 한 단면으로 확장되고 있다.
'금융'과 '마케팅'이라는 분야를 통해 '예술'을 하나의 콘텐츠로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 어쩌면 당연하고 익숙한 이야기를 거창하게 설명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든다. 물론 ‘예술'을 다루는 분야가 많아지고 점차 대중들에게 친숙한 분야로 다가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미술업계에서는 ’도도한 미술‘에 대한 고정관념이 아직 유리장벽처럼 남아있다. 주인공으로서의 ’예술‘을 벗어나 살짝 관점을 바꾸어본다면 어떨까? 그래서 '예술'을 하나의 콘텐츠로 바라보면, 더 큰 그림의 규모의 경제를 통해 '예술'을 이용한 기획을 해보고, 더 다양한 분야의 이야기에 목소리낼 수 있지 않을까. 콘텐츠로서의 예술은 대중들이 일상생활에서 '예술'을 감상하고 소비하도록 하는 소프트 파워(Soft Power)의 역할을 할 것이고, 이는 이질적이라고 여겨지는 다양한 가치를 한 데 묶고 엮으며 우리의 성장을 도모하는데 엄청난 저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믿어보며 글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