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미 준의 건축을 통해 배운다
예전 사무실에는 책이 참 많아서 틈틈이 한 권씩 읽었는데, 그중 하라 켄야의 <백> 이라는 책을 아주 인상 깊게 보았던 기억이 난다. 책에서 언급하는 백(百)은 단순히 백색 색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 문화 속에 깃들어 있는 '백‘의 개념을 이해하고 인식하는 방향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그때 처음으로 공백의 개념과 젠(선불교) 정신을 담고 있는 일본정원의 특성에 대해서 배울 수 있었다. 젠 가든 (Zen Garden)은 '고산수(枯山水)식 정원'으로 (물 없이) 화려하지 않은 자갈, 모래, 이끼 등으로 정원을 조성해, 탐욕과 사치스러움을 지양하고 사무라이 정신의 검소함과 내재적인 의미를 지향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또한, 자연이라는 외부 공간과 내부 공간을 단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연결시키고자 하는 공존의 태도를 보여주는데, 이런 '젠 가든'에 담긴 사상을 접하며 처음으로 공간과 그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 간의 관계성에 대해서 인지할 수 있었다.
유동룡 건축가는 '이타미 준'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재일 한국인 건축가이다. 몇 년 전, '젠 가든'의 매력을 알게 되면서 관련 책들을 보다 처음 접하게 된 이타미 준의 건축물로 <석채의 교회 (1991, 일본 홋카이도)>가 있는데, 홋카이도라는 지리적/지형적 특성 속에서 초라하지 않은 건축이 되기 위해서 '본토박이의 혼'을 담고자 했던 건축가의 사상에 매료되었던 기억이 난다. 젠 정신을 구현하고자 한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이타미 준의 담백한 건축물이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이야기한다고 느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얼마 전 우연한 기회로 이타미 준에 대해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영화 <이타미 준의 바다>와 책 <손의 흔적>을 감상하며 제주도에 다녀왔다. 갑자기 잡힌 일정이라 예약이 필수인 <수풍석 뮤지엄> 대신, <방주교회>와 작년 개관한 <유동룡 미술관>을 방문했다.
<방주교회>는 원래 ‘하늘의 교회’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름처럼 멀리서 보아도 건물 지붕에 투영된 제주 하늘이 아주 독보적이란 인상을 주었다. 지붕은 징크라는 소재를 사용해 물속 물고기가 하늘을 향해 올라올 때 빛에 반짝이는 물고기 비늘을 형상화했다고 하는데, 이런 발상을 건축으로 구현시켰다는 것 자체가 이색적이었다. 생각해 보면 제주도는 지리적 특성상 날씨가 변덕스럽고 시시각각 다채롭게 변하는 하늘이 특징인데, 그런 하늘의 표정을 건축에 담아낸 개념을 통해서 지역 본연의 모습을 대변하고자 했던 건축가의 의도를 느낄 수 있었다.
<방주교회> 외관이 주변 자연을 어우르는 것이 특징이라지만, 내부 또한 외부의 빛, 물 등 자연이 머물다 갈 수 있도록 설계한 느낌을 준다. 건축물 자체가 주변 환경과 잘 어우러지고 버무려지는 느낌이랄까? 교회라는 이름이 없었다면, 그저 이 자연환경을 한 바퀴 돌아보고 차분하게 사색하도록 만든 공간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방주교회>를 차분히 둘러보고 차로 약 20분 거리에 위치한 <유동룡 미술관>으로 향했다. 현무암으로 만든 돌담이 가장 먼저 방문객들을 반겼고, 1-2층으로 구성된 미술관 내부의 (전시관, 라이브러리, 그리고 티 라운지) 모든 공간에서 이타미 준 건축가의 사상과 궤도를 엿볼 수 있는 짜임새가 좋았다.
<손의 흔적> 책을 읽다 보면, 이타미 준은 토착 재료를 사용해서 그 땅이 지닌 오래된 가치를 현대에 다시 부활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산업 사회 이전의 조형적 순수성 혹은 야성미를 추구했다고 하는데, 그러한 사상이 깃든 조형물과 드로잉을 직접 볼 수 있다는 점이 <유동룡 미술관>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만약 누군가 이타미 준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고자 한다면, 그 시작이 이 미술관이면 좋을 것 같다고 이야기할 만큼 말이다. 추후에 다양한 콘텐츠가 더해져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방문객 유입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풍토, 경치, 지역의 문맥(context) 속에서 어떻게 본질을 뽑아내고 건축에 스며들 수 있게 하는지를 고려합니다. 경치와 건축이 대립해도 좋고 조화가 돼도 좋습니다. 거기서부터 발생해서 새롭게 펼쳐지는 세상을 저는 보고 싶습니다.”
- 이타미 준 (통일일보 이우환 작가와의 대담 중) -
이타미 준이라는 건축가를 전반적으로 느낄 수 있는 미술관도 좋았지만, 그의 건축물을 직접 본 잔상이 더 오래 남는 이번 제주도 일정. 쏟아지는 예술 작품 속에서 같은 예술가의 다른 작품이 기대되고 궁금해진다는 평가는 최고의 찬사가 아닐까 하는데, 나에게 이타미 준은 그런 예술가 중 한 명인 것 같다. 기회가 된다면 일본에 있는 <M 빌딩>, <석채의 교회> 등을 실제로 다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말이다. (제주에 위치한 포도호텔 내부는 못 보았지만 <방주교회>로 향하는 길에 외부 구조는 멀리서나마 눈에 담아볼 수 있다!)
이타미 준을 느껴보는 짧은 일정을 뒤로하고 제주 공항으로 가는 길, 내가 이 건축가에게 느낀 매력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건축물에 담긴 그의 사상 때문이겠지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건축 자체가 인간과 자연의 매개체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고민했고, 늘 우리 주변에 있는 자연 소재를 통해서 건물을 짓고자 했고, 또 그 공간을 통해 자연과 인간이 만나는 의미 있는 순간을 제공하고자 했으니까 말이다. 이타미 준은 이미 몇십 년도 전에 건축가로서 ‘시대를 관통하는 독창성’이란 게 무엇인지 정의하며 그것을 구현하고자 부단히 노력했기에, 그의 매력은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지금의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고 느꼈다.
다양성과 독창성이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가치로 인식되는 요즘이다. 문화예술계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번뜩이는 아이디어나 시각적 자극을 내세운 독창성을 이야기하지만, 어쩌면 독창성이라는 가치는 외부의 자극이 아니라 ‘나 혹은 우리’라는 내부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라고 이타미 준을 보며 생각해 본다. 그의 말대로,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에 우리의 역사적, 지역적, 문화적 뿌리가 담길 때 비로소 인간도 그 공간에서 나다워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내가 '젠 가든'을 통해 공간과 인간의 관계성에 대해서 인지할 수 있었다면, 이타미 준의 건축물을 통해서는 ‘그 지역의 고유한 문화에서 발현되는 독창성이 공간에 담길 때, 비로소 그 공간 속 사람이 시대를 뛰어넘은 소통을 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originality 뿌리가 지역, 공간, 그리고 사람을 한데 어우러지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짧은 일정이었지만 이타미 준을 통해 배운 어쩐지 허무하고도 대범한 이 교훈, 아마 오래도록 ‘나다움’을 정의하는데 이정표 역할을 해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