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베네치아
: 텅 빈 물의 도시
나에게 베네치아의 첫 이미지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받은 도시였다. 때는 2019년 11월, 1.87m까지 치솟은 조수로 50년 만의 최악의 홍수가 베네치아를 덮쳤다는 뉴스로 유럽이 떠들썩하던 시기였다. 당시엔 매년 가을과 봄 사이에 베네치아가 홍수에 취약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이미 예약한 비행기 티켓과 숙소는 취소 불가능한 옵션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숙소에 이메일을 보내보니 정상영업 중이라는 예상보다 빠른 회신..!
”We operate normally. Looking forward to seeing you on the date you booked!“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나는 그 답장에 ‘생각보다 상황이 괜찮은가 보네' 위안하며 오스트리아 빈에 사는 친구와 만나 예정대로 베네치아로 향했다. 세상 곳곳에서 오는 수많은 관광객이 예약을 취소하고 발걸음을 돌릴 때, 산란기 연어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기분이 이런 걸까 생각하면서...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주데카(Giudecca) 골목 끝자락에 위치한 아담한 숙소. 불행 중 다행일까, 호텔 로비의 1/3은 물에 잠겼었지만 객실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며 반갑게(?) 우리를 맞이하는 직원의 도움으로 나와 친구는 우중충한 도시 한편에 짐을 풀었다. 그리고 그 유명하다는 비엔날레에도 방문객이 거의 없어 여유롭게 구경할 수 있겠다며 낙관하던 마음도 잠시, 우리는 베네치아에 머무는 며칠 내내 홍수를 피해 정상영업 중인 마트나 식당을 찾아 헤매어야만 했다. 텅 빈 도시와 허기진 시간, 나에게 베네치아의 첫인상은 이렇게 쓸쓸한 인상으로 가득했다.
: 2022년 베네치아와 다시 만났다. 이번엔 출장으로!
파리에서 명품 산업, 소위 명품 마케팅(luxury marketing)에 대한 견문을 넓히던 차에 어떤 바람이 불어서인지 나는 미술시장에 상당히 관심이 많아졌다. 아마 명품 브랜드들이 각자의 재단을 통해 다양한 전시들을 선보이던 것을 보며 '명품의 끝판왕은 미술이 아닐까?' 생각하던 게 동기가 되었던 것 같다. 루이비통이나 프라다 등에서 선보이는 전시 공간들을 이리저리 찾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내 시야도 예술 분야로 자연스럽게 확장되었고, 약 1년 뒤쯤, 한국에 귀국하며 인연이 닿은 갤러리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을 계기로 나는 미술시장에 발을 들였다.
내가 입사한 갤러리는 '아트 앤 디자인(Art & Design)'을 통해 동서양 문화 사이의 가교(架橋) 역할을 목표로 하는 곳이었다. 때문에 작품 매매 이외에도 국내외 다양한 문화 프로젝트들을 기획했는데, 그중 하나가 전광영 작가님의 베네치아 아트 비엔날레(La Biennale d'Arte di Venezia). 사실 입사 초반엔, 내가 맡은 업무가 아니기도 했고 비엔날레가 의미하는 바도 체감하지 못하던 때라 프로젝트에 대한 내용을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베네치아와 인연이 있었던 것일까? 나는 조금씩 해외 업무들을 익히는 것을 시작으로, 자연스레 비엔날레 프로젝트에도 투입되었다.
난생처음 해보는 대규모 전시, 게다가 해외에서?
난생처음 해보는 대규모 해외 전시. 나는 중국, 이탈리아 등 해외에 있는 팀원들과 소통하며 전반적인 진행 상황을 확인하고 계약 및 일정 관리를 했어야 했는데, 매일 쏟아지는 이메일을 읽고 답장하며 식은땀을 흘렸던 기억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나에게 익숙할 리 없는 업무였기에, 상황을 이해하고 따라가는 것에 급급해 남몰래 눈물을 훔친 적도 정말 많았다. 작가를 비롯해 미술계에 종사하는 기획자, 큐레이터 등에게 꿈의 무대가 베네치아 비엔날레라지만, 당시 나에게는 하루하루 쌓이는 이메일이 무서워 출근이 망설여질만큼 막연하고 두려운 현실 그 자체였던 기억이다.
하지만 이런 마음은 일이 진행되는 과정을 보면서, 프로젝트가 가시화되어 가면서 점차 바뀌기 시작했는데... 코로나 시국에 행사가 1년 미뤄진 때이기도 했고, 해외 입출국이 자유롭지 않던 터라 줌(zoom)으로 회의에 참여하고 이메일로 상황을 디벨롭시키는 일들이 나에게 세상 저 편에서 일어나는 작당모의에 가담하는 느낌을 줬다. 간질 간질한 기분! 그리고 이 간지러운 기분이 설렘으로 바뀔 때쯤, 나 또한 프로젝트에 대한 애정이 커졌고, 일에 누가 되지 않도록 책임감 있게 내 몫을 해내고 싶단 욕심도 생겼던 것 같다. 그렇게 일 년이 채 안 되는 시간을 보냈을까, 우리 팀이 연말에 넣은 지원서가 2022년 초에 베네치아 비엔날레 공식 병행 전시(collateral event)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다시 간 베네치아
본격 작품 설치와 전시 오프닝 준비를 위해 2022년 3월에 다시 방문한 베네치아. 사실 공항에 도착해 전시장까지 가는 동안에도 마음이 많이 무거웠다. 다사다난한 상황들을 뒤로하고 소신껏 온 출장이기도 했고, (대표님들과 해외 담당자들을 제외하고) 한국에서 실무를 담당한 사람이 나 혼자라 혹시나 내가 놓친 일들이 있으면 어떡하나, 실수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많았다. 그리고 실제 이런 기우는 현장 곳곳에서 발생했는데.. 다행히도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모든 대장님들(?)과 팀원들의 도움으로 큰 무리 없이 오프닝 행사까지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아마 이 글을 쓰는 시점으로부터 딱 1년 전의 일이라, 그 사이에 많은 희로애락의 기억들이 미화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게 어려운 시간의 연속이었지만 큰 프로젝트의 일원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음에, 그 여정을 응원해 준 주변사람들이 있었음에 지금은 감사함을 많이 느낀다.
누군가 나에게 이 과정을 겪으며 무엇이 가장 감사하고 값진 경험이었는지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 인생사 새옹지마다' 이런 말들을 피부 끝으로 체감하며 짜릿한 기분을 맛본 것이나 내 경력에 한 줄 추가된 'project coordinator'라는 타이틀도 좋지만, 나는 '다시 바라본 매력 넘치는 베네치아‘ 그 자체가 제일 좋았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베네치아의 매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짧게나마 이 도시 역사에 대한 언급을 빼놓을 수가 없다. 세계적인 물의 도시라는 애칭으로 유명한 베네치아. 영어로 '베니스(Venice)'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118개의 작고 큰 섬들이 모여 400여 개의 다리로 연결된 수상도시다. 때문에 섬과 섬 사이를 잇는 배들이 교통수단의 전부! 베네치아 마르코 폴로 공항과 산타루치아 기차역이 있기는 하지만, 베네치아 본섬에서는 수상버스인 바포레토(vaporetto)를 타거나 좁은 운하 골목골목을 걷는 방법뿐이 없다.
사실 베네치아의 이 제한적인 교통수단은 도시의 지리적 위치와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데, 이를 엿볼 수 있는 도시의 유래를 보면 다음과 같다. 베네치아는 로마제국 말기인 5세기, 이민족인 훈족의 침입을 피해 어디로 달아날까 고민하던 북동쪽의 베네토 지방 사람들이 만든 인공섬에서 시작하였다. 당시 베네토 지방 사람들(a.k.a 보트피플)은 훈족의 침입에 더 물러날 곳이 없자 석호 주변의 개펄지대로 몰려갔고, 베네치아 만 안쪽에 형성된 늪지대에 수많은 백향목 말뚝을 박고 석재와 시멘트를 다져서 마을을 형성했다. 이후, 6세기에 랑고바르드족의 침입에 더 많은 사람들이 개펄지대로 모여들게 되자 이 해상난민촌(마을)은 리알토 섬을 중심으로 점차 도시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척박한 베네치아의 반전사, 단절 혹은 개방?
인공섬으로 구성된 베네치아. 사실 이곳은 지리적 한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데, 순수 자원이 없는 척박한 땅에 두 발로 달리는 운송수단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네치아를 단순히 고립된 지역으로 치부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베네치아의 개방적인 역사‘를 통해 이해해 볼 수 있다. 베네치아는 697년 첫 주민투표를 실시해 국가원수 격인 '도제(Doge/통령)'을 선출하며 공화정체제를 갖추기 시작했고, 서기 1000년에 이르자 인근 아드리아 해적들을 소탕하고 그 연안에 있는 달마티아에 첫 식민지를 개척하며 해양국가로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
도제가 다스리는 해상공화국, 특히 여기서 ‘도제’는 교황과 황제의 중재 역할을 통해 관세와 해상무역으로 이득을 얻었고, 이는 베네치아가 지리상 유럽과 동방을 잇는 거점으로 나아가는 기반이 되었다. 14세기엔 라이벌 해상공화국인 제노바를 누르고 지중해 동남부의 섬들, 그리스, 소아시아, 그리고 북부 이탈리아까지 세력을 확장하며 유럽에서 손꼽히는 부자 도시로 성장했고, 15세기엔 지중해 동부까지 장악하며 황금시대를 맞았다. 더욱이 이 시기에 세계 각지의 상품이 베네치아에 모여들며 거래가 이루어졌고, 이를 통해 도시는 금융의 중심지로 발돋움하며 정치경제적 입지를 공고히 해나갔다.
비록 베네치아의 태평성대는 1453년 동지중해 교역의 거점 콘스탄티노폴리스(현재의 이스탄불)가 이슬람의 튀르크 세력에 의해 무너지고, 1492년 마르코 폴로가 신대륙을 발견하는 상황 등으로 점차 그 위력을 잃어갔지만, 베네치아가 황금기를 누렸던 약 1000년의 시간 동안 이룬 문화적 발전은 오늘날까지도 그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 베네치아 출신의 문화예술계 유명인들로 '사계'의 작곡가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Lucio Vivaldi), '동반견문록'의 저자 마르코 폴로(Marco Polo), 이탈리아의 모험가 조반니 카사노바(Giovanni Giacomo Casanova) 등이 있다.
* 베네치아에 가면, 총독 관저로 건설되었던 두칼레 궁전(Palazzo Ducale)을 방문해 보길 권장한다. 베네치아 총독을 도제(Doge)라고 하기에 도제의 궁전(Doge's Palace)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사방으로 뚫린 개방형 구조를 통해 베네치아의 자유로운 정신을 대변한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며, 2022년 이곳에서는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의 'Questi scritti, quando verranno bruciati, daranno finalmente un po’ di luce (Andrea Emo)'전시가 열렸다.
그렇다면 중세 해상제국의 오늘날은 어떤 모습일까? 경제적인 측면에서 파악해 보면 이탈리아는 2023년 GDP 기준 세계 8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 중 베네토 지역은 GDP 3위에 위치해 있는데, 비록 화려한 과거의 명성과 비교하면 만족할 만한 성적이 아닐지 모르지만 이 지역의 주요 수입원이 '관광업'임을 고려하고 보면 상당히 의미 있는 수치로 이해할 수 있다.
베네치아의 수입원천, 문화예술
베네치아는 물 위의 도시라는 물리적 환상 이외에 정서적 환상도 제공하는 도시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비엔날레’. 베네치아 비엔날레(la Biennale di Venezia)'는 베네치아 지역에서 비엔날레 재단이 2년마다 개최하는 국제 문화 전시회이다. 아트 비엔날레(La Biennale d'Arte di Venezia)와 건축 비엔날레(La Biennale d'Architettura di Venezia)가 2년마다 도시를 축제의 장으로 만드는 것은 물론 음악, 연극, 영화, 춤을 주제로 하는 행사도 매년 열리기에 매년 베네치아를 방문한다고 해도 해마다 다른 문화 예술을 경험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베네치아의 이러한 '문화적 다양성과 확장성'은 이 도시에서 열리는 행사의 의미와 규모를 '전 세계계인의 축제'라는 범위로 확장시키며 도시 성장을 이끌어왔고 현재도 이끌고 있다. 실제로 2013년 글로벌 경제위기로 베네치아 시가 비엔날레 예산을 줄이자, 나머지 절반 정도의 비용은 외부 후원을 통해서 충분히 충당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이제 비엔날레라는 행사는 단순히 베네치아 지역을 자생하도록 하는 수단 이상의 가치를 지녔다고 해석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지리적 한계를 지닌 한 도시가 뿜어내는 문화적 영향력이 얼마나 세계적인 범위인지 짐작해 보게 된다.
나에게 베네치아를 한 가지 키워드로 정리하라고 한다면 '성장'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을 만큼, 베네치아를 경험하며 나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단점이 장점으로 여기지는 곳, 척박한 땅을 딛고 자신들이 가진 문화를 보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치관, 그리고 이런 유산을 도시의 주요 산업으로 확장해 나가는 힘 - 모두 베네치아를 통해 느낄 수 있는 생명력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공간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문화예술을 통해 한 도시를 가꾸어나가는 힘을 깨달은 것도, 그리고 이런 산업 구조를 위한 기획을 꿈꾸게 된 것도, 다 그 시작은 이 베네치아의 생명력과 맞닿아 있지 않을까.
나를 성장시켜 준 ‘나의 사적인 베네치아’, 아마 이것이 내가 두 번의 베네치아를 경험하면서 얻은 가장 값지고 감사한 교훈이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