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타고난 INTJ다. 그래서인지 어떤 판단이나 평가를 할 때면 분석이나 비판, 또는 논리라는 잣대를 갖다 대려 한다. 근데 그림을 그릴 때는 이런 성향이 독이 된다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한다. 그저 아이처럼 순수하게 그 순간에 빠져 그릴 수 있으면 좋으련만, 언제부터인가 모든 걸 재고 있다.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데도 그림을 계속 그리는 게 맞을까?”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이미 수두룩한데 그보다 못한 내가 그림을 그린다 해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가 노력한들, 이게 다 무슨 소용이지?”
그렇다. 내 그림이 아무 쓸모가 없다면, 나 말고도 타인에게 어떠한 의미를 주지 못한다면, 그리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는 건 물론, 이내 깊숙한 우울감에 빠지게 된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이 무의미하니 무기력해지는 건 당연하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노력이 어떤 수치화될 수 있는 결과물로 이어지길 바란다. 나는 SNS에 그림을 올릴 때마다 몇 명의 사람들이 내 그림을 봤는지, 좋아는 하는지, 피드백은 없는지, 신경 쓰고 싶지 않아도 신경이 많이 쓰이는 게 사실이다. 내가 이만큼 열심히 그렸으니 사람들이 그 노력을 알아봐 주었으면 한다.
근데 그림에 들어간 시간과 정성에 비해 반응이 미미하다고 느껴지면 그때마다 마음이 조금씩 무너진다. 계속 걸어 나가야 되는데. 그걸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앞으로 한 걸음 내딛는 것조차 힘들게 느껴질 때 드는 생각은 항상
“나는 왜 이렇게 나약할까?”
이다. 이건 악순환이다. 내 그림이 쓸모가 있냐 없냐로 가치를 매기고, 그 가치를 증명해 줄 수 있는 숫자로 평가를 내렸을 때 쓸모가 없다고 느껴지면 무기력해지고, 무기력하니 그림을 놓게 되고, 그런 내 모습이 나약해 보여 자책을 하게 되고, 어떻게든 그 늪에서 빠져나와 그림을 그리면 또 같은 질문을 하고 있고...
이 우울하기만 한 잿빛 감옥에 안 갇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나는 그 방법이 가치 판단을 달리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 가치가 항상 증명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숫자가 아니어도 된다.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 느끼는 설렘. 완벽하지 않아도 하나하나씩 그려보며 얻게 되는 깨달음. 그림을 완성했을 때 느끼는 뿌듯함.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 내가 가치 있다고 느끼는 것들이다.
요즘 산책을 나가면 아무렇게나 피어 있는 꽃을 보며 그 작은 존재가 주는 큰 기쁨을 되새겨본다. 그 꽃 하나하나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음을. 쓸모가 없어도 괜찮다. 지금은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그 작은 꽃들이 모여 아름다운 들판이 되리라.
오늘도 나는 잣대를 하나 쥐고 있다. 그러니 그 손을 펴 놓아보자. 나의 작은 꽃들이 피어오를 수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