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니트랑책이랑 Sep 25. 2023

[영화 리뷰] 앙:단팥 인생 이야기

당신과 만날 때 내가 이랬으면 합니다.

누군가를, 존재 자체만으로 경이롭게 여기고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그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 변화를 기다려준 적이 있을까? 아마도, 부모들이라면 경험해 봤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대상을 타자라고 여기면 상황은 달라진다. 우리는 한 대상을 타자의 범주에 넣는 순간, 그 존재가 얼마나 경이롭게 소중한 존재인지 알아봐주는 여유를, 조심스러운 정성을 받을 만한, 가치 있는 존재임을 알아보는 지혜를 잊는다. 상처 주고 상처 받는 우리 인생의 많은 문제는 여기에서 출발하는 듯하다.


앙증맞게 작고 둥근 핫케익 같은 빵이 단팥 소를 품고 있는 과자, 도라야키. 벚꽃이 만발한 봄날,  자신의 작은 도라야키 가게로 출근하는 센타로의 모습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센타로의 가게는 벚꽃이 하얗게 흐드러지게 핀, 큰 벚나무 앞에 있다. 가게 안에서 도라야키를 먹으며 한창 수다스러운 여중생들의 소란스러움에 무뎌지려는 듯, 무심한 손길로 도라야키를 만드는 '센타로'. 여중생 중 한 명이 도라야키의 단팥 소 안에 벚꽃잎이 들어있다고 투덜대자, 센타로는 여중생들에게 도라야키를 하나씩 더 주며 보낸다.

도쿠에는 그 단팥 소 안의 벚꽃잎처럼 그 가게에 찾아든다. 76세의, 손이 불편한 '도쿠에'. 그 벚꽃 나무를 배경으로 센타로의 가게에 얼굴을 내민다. 도쿠에는 센타로에게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다고 하지만 센타로는 거절한다.  그리고 며칠 후 다시 가게를 찾아온 도쿠에는 센타로에게 자신이 만든 팥소를 건넨다. 센타로는 그 팥소에 매료되어 도쿠에게 팥소 만드는 역할을 부탁한다.


그렇게 시작된 센타로와 도쿠에의 팥소 만들기. 해를 해님이라고 부르는 도쿠에는 해님이 얼굴 내밀기 전에 준비를 시작하자고 하고,  센타로는 어쩔 수 없이, 해가 뜨기 전에 가게 문을 열고 도쿠에와 함께 팥소를 만들기 시작한다. 도쿠에와 팥소를 만드는 과정은 조심스러움과 지켜봄과 기다림과 경탄의 연속이다.


"복잡하네요."

"극진히 모셔야 하니까."

"모신다고요? 손님 말인가요?"

"아니 팥들."

"팥을요?"

"여기까지 힘들게 와줬으니까."


당을 넣고 또 기다려야 한다며 앉는 도쿠에의 말에 또 기다려야 하냐며 놀라는 센타로를 도쿠에는 쳐다보지도 않고 당연하다는 듯이 말한다.


"갑자기 끓이는 건 실례잖아. 당과 친해질 동안 기다려 줘야지. 그러니까, 맞선 같은 거야. 뒷일은 젊은 남녀에게 맡기면 돼."

"몇 시간이나 지켜보죠?"

"글쎄, 약 두 시간 정도?"


그렇게 팥을 향한 응원과 지켜봄과 기다림의 두 시간이 지난 후, 팥을 태우지 않고, 빨리 그러나 휙휙 젓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저으며 팥을 뭉근히 달이는 시간을 거친 후에야 팥소는 완성된다. 그 맛은? 물어 뭐하랴! 도라야키 가게를 하면서도 단 게 싫어 도라야키 하나를 다 먹어본 적 없는 센타로가 도라야키 하나를 거뜬히 다 먹게 하는 맛이고, 단골 중학생들조차 팥의 존재감을 알아보고 센타로에게 뒤늦게 의욕이 생겼냐고 묻는 맛이고, 가게를 찾는 손님들마다 칭찬해서 가게가 문전성시를 이루게 하는 맛이다.

이후로도 늘 도쿠에는 팥소를 만들 때 팥들을 응원한다.

그렇게 해피엔드인가 했으나 도쿠에의 한센병 소문이 돌고 난 후 손님이 뚝 끊기고, 어느 날 도쿠에는 센타로에게 감사했다며 고개 숙여 마지막 인사를 하고 가게를 그만두게 된다.


혼자서 가게를 지키는 센타로에게 한센병자 집거촌에서 도쿠에가 보낸 편지.

항상 팥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그것은 팥이 보아 왔을 비 오는 날과 맑은 날들을 상상하는 일이지. 어떠한 바람들 속에서 팥이 여기까지 왔는지 팥의 긴 여행 이야기들을 듣는 일이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언어를 가졌다고 믿어. 햇빛이나 바람의 이야기도 들을 수가 있다고 생각하지. 그래서일까? 지난밤에 울타리를 넘어 불어오는 바람이 사장님에게 연락을 해 보라고 속삭이는 듯 느껴졌어.  아무 잘못도 하지 않고 살아가는데도, 타인을 이해하지 않는 세상에 짓밟힐 때가 있어. 지혜를 발휘해야 할 때도 있지. 이런 인생 이야기도 들려줄 걸 그랬어. 언젠가는 사장님이 사장님만의 특별한 도라야키를 만들어 낼 거라 믿어. 스스로 개척한 길을 걸어가야 해. 사장님은 해낼 수 있어.


센타로는 도쿠에를 찾아간다. 확연히 수척해진 도쿠에는 중학생 때쯤 함께 버스를 타고 와서 오빠가 자신을 격리시설에 남기고 간 일과 그 전날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 밤새 하얀 무명천으로 블라우스를 만들어 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도쿠에는 센타로에게, 정말 고마웠고,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자신은 괜찮다고 말한다. 벚꽃이 아름다웠다고, 벚꽃이 흐드러진 봄날이 시작이었다고 말한다. 도쿠에를 만나고 와서 삶의 용기를 가지게 된 센타로.  


도쿠에에게 보내는 센타로의 편지

사실 저는 당신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사회와 격리된 시간을 보냈습니다. 도라하루에 오기 3년 전이죠. 일하던 술집에서 싸움을 말리다 결국 주먹을 휘둘렸고 한 사람에게 심한 장애를 남겼습니다. 복역 중 어머니는 몇 번이고 면회를 오셨어요. 안타깝게도 출소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어드리지 못했지요. 남의 말을 들어줄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센타로는 새로 개발한 도라야키를 들고 도쿠에를 다시 찾지만 도쿠에는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도쿠에가 남긴 조리도구와 녹음 테이프.


사장님, 잊지 마. 우리는 세상을 보기 위해서 세상을 듣기 위해서 태어났어. 그러므로 특별한 무언가가 되지 못해도 우리는, 우리 각자는 살아갈 의미가 있는 존재야.


다시 온 봄날,  공원 어느 벚나무 아래에 노포를 차린 센타로가 '도라야키 사세요!'를 힘껏 외치며 미소짓는 모습으로 영화는 끝난다.


누구나 자기만의 역사가 있다. 도쿠에가 팥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듯, 우리도 타자의 살아온 이야기, 살아가는 이야기를 조금만 더 정성스럽게 들어주는 지혜를 가진다면, 도쿠에의 극진한 응원이 팥을 매력적인 팥소로 변화시키고, 무기력에 허우적대던 센타로를 위로하고 자신만의 도라야키를 만들어 세상을 향해 외칠 수 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처럼,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더 의미 있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도록 힘을 불어넣을 수 있지 않을까?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우리의 봄날을 꿈꿔본다.

작가의 이전글 [영화 리뷰] 힐빌리의 노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